지독한 변태들
뭔가에 관심 가지면 책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대출기간 내내 표지만 보고 도서관에 반납한 책도 있지만,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은 달랐다. 연필에 꽂혀 빈티지 연필 한 자루를 1만 원에 사고서(...) 내친김에 책까지 빌렸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살면서 폭포를 맞으며 연필 깎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사람은 연필 깎기로 돈을 번다. 변태는 브랜드가 될 수 있구나.
어느 정도까지 변태냐면, 연필밥은 연필 주인의 것이라며 족집게로 모아서 주는데 이때 사용하는 족집게가 짐 싸서 나간 아내가 남긴 것이라고 한다. 또 유명인처럼 연필 깎는 법이라며 책 후반부에는 연예인 코스프레를 하고서 연필을 쥐고 있는 사진이 있는데, 여기까지 보고 나니 변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연필에 이어 책까지 사고 싶게 만드는 변태의 매력을 느꼈다.
최근에는 당근 거래를 통해 열정적인 사람을 만났다. 내가 파는 물건을 사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분이었다. 동네인증을 위해 휴가까지 쓰고 서울로 오신 거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물건을 판 건 아니고, 이제는 품절된 옛날 만화영화 블루레이일 뿐이었다. 앞으로 볼 것 같지 않아서 싸게 내놓았는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저 멀리 타 지역에서 손님이 온 것이다. 난 정말 거래자의 실행력을 보고 감탄했다. 나도 정말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전국 어디로든 갈 열정이 있나? 이 또한 변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래 후기로 인사를 길게 남겨주셨는데, 댓글 기능이 있었다면 나도 감사 말씀을 더 보태고 싶었다.
독서기록을 무척 잘하고 또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다. 난 그를 몰래 변태라고 부른다.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노트를 여러 권 갖고 있다. 책 읽으며 좋았던 점과 들었던 생각을 정갈하게 적은 글씨, 그 빼곡한 글 사이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자리 잡은 스티커들. 그런 노트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에 놀라고 만다. 그 부지런함과 지구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렇게 물어보지만 난 대충 답을 알고 있다. 아마도 좋아하는 마음일 것이다.
누구든지 변태 같은 구석이 있다. 잘 모르겠어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모르겠다면 친구한테 물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 줄 것이다. 내 주변만 살펴봐도 변태같이 질문 많이 하는 사람, 변태같이 잃어버린 물건을 포기 못하는 사람, 변태같이 사물의 오와 열을 맞추는 사람, 변태같이 미니멀한 사람…… 넘친다. 이렇게 농담같이 말해도, 어떤 것에 열중하는 사람은 멋지다. 누군가 변태 같다고 말할 정도의 특별함이 있다는 것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특별함을 알아볼 수 밖에 없다. 지독한 변태가 멋있는 이유다.
만원 주고 산 연필을 아깝다 생각하지 않도록 잘 써봐야겠다. 요새는 손으로 쓰는 것도 많다. 일기를 비롯해 다이어리, 영화전시 관람후기, 독서노트 등이 있다. 이 중 반 이상을 연필로 쓰고 있는데, 이참에 몽당 연필 만들기를 올해 목표로 삼아보는 것도 좋겠다. 짧아진 연필을 친구에게 자랑하면 변태 같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을까? 요새는 자기 PR과 브랜드 구축이 중요하다던데, 물론 진짜 변태라면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변태 같다는 말을 반농담 일지라도 칭찬으로 쓰고 있다. 넌 정말 특별한 점이 있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브랜드가 될 모든 변태를 응원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