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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재 Nov 19. 2023

3. 빛의 향연, 매일 달라지는 갈색 그림

그림인가, 누수인가

[사진 출처 : pexels]

황토색 점 아래 흔들리지 않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천장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누수가 맞았다.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나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저기 봐봐요. 누수 같아. 아직 안 고친 건가, 다시 새는 건가, 뭔지 모르겠네. 어떡하지?”

의자 위에서 천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남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집주인에게 알리자고 했다. 분명 계약할 때 집주인은 또 물이 새면 고쳐주겠노라 호언장담하였고, 나는 그래도 여자인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집주인에게 전화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 401호 새댁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집 천장에서 누수로 보이는 점이 생겼어요. 만져보니 물기가 느껴지는 게 누수 같아요. 다시 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좀 오셔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언제쯤 오실 수 있으실까요?”

사실 이 소식을 전할 때 집주인이 짐짓 놀랄 줄 알았다. 고쳤는데 무슨 소리냐, 그게 다시 왜 새냐 큰 소리를 낼 줄 알았다.

“알겠어, 새댁. 조만간 한번 갈게. 뚝-.”

애초에 안 고친 건지까지는 몰라도, 당신이 고쳤겠지만 어쩌다 보니 다시 새는 것 같다는 식의 말로 나는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에둘러 말하였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태연한 태도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온다고 했으니, 그녀를 기다렸다.      




방문하겠다는 사모님은 언제 방문할지 도통 알려주지 않았다. 회사 출근과 공부로 평일에는 거의 집을 비우는 우리는 집주인이 헛걸음할까 봐 방문 날짜와 시간을 미리 알려달라 부탁하였다. 전화하고 문자를 해도 사모님은 조만간 방문할 테니 그저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친정엄마께 하소연했다. 엄마는 집주인이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라 하셨다. 엄마 세대에서는 ‘집주인은 웬만하면 심기를 건들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도 경험 있는 어른 말씀이 틀리진 않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야겠다 마음을 다스렸지만, 눈길은 계속 천장 황토색 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사이 비가 오는 몇 번의 날이 지나갔다. 작은 황토색 점은 점점 제 몸집을 키워갔다. 비가 조금 오는 날은 사과 크기만 했다가, 비가 많이 오는 날은 구름만 해지기도 했다. 물기 있는 벽지가 말라 꼬들꼬들해지면 다시 그 위로 물이 샜다. 빗물 얼룩이 겹치고 겹쳐 매일 갈색 그림이 달라졌다. 심지어 비가 많이 오는 날은 그 범위와 물길의 모양이 실로 대단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한번 시작된 누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러다 벽지가 뚫리는 거 아니야?’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물감을 덧칠하다 결국 구멍이 난 도화지가 생각이 났다.     


신혼집이었다. 내가 고른 새하얀 벽지였다. 누수로 갈색 그림이 계속해서 퍼져갔다. 그런데 집주인은 응답이 없다. 그저 기다리라고만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 하는 거지? 집주인이면 이래도 되는 거야?’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드디어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수를 알린 지 무려 두 달만이었다.     




“새댁, 집 열쇠 좀 하나 비상으로 줘봐.”

“네? 비상키를 달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요새 하도 바빠서 지금 그 집엘 가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다 갑자기 가게 됐을 때 새댁이 집에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내가 들어가서 좀 보고 그러게. 앞으로 수시로 가려면 비상키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사모님.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오실 날짜 알려주시면 제가 그 시간에 집에 있을게요.”

“참, 어른 말 안 듣네. 새댁, 비상키를 줘야 내가 가서 고쳐줄 거 아니야. 내가 갑자기 갔을 때 새댁이 없으면, 그땐 어떡할 건데? 아니 물 새는 거 고쳐 달라며. 그럼 협조해야 해 줄 거 아니야. 집 안 고치고 싶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두 달간 그저 기다리라며 전화도 문자도 피한 양반이, 갑자기 내가 비상키를 안 줘서 집을 못 고친다는 게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지.

“사모님. 비상키를 드리면 저희가 없을 때 오실 수도 있다는 건데, 그건 저희도 좀 그래요. 오시는 날을 미리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때 기다릴게요. 언제쯤 오실 수 있으신데요?”

“아휴, 진짜 젊은 사람이 말이 안 통하네. 그 집 마스터키가 어디 있을 텐데. 아, 일단 알겠어. 뚝-”     


‘뭐? 집주인한테 마스터키가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우리 집 현관 잠금장치는 비밀번호로 열리는 게이트맨 도어록과 열쇠로 열리는 손잡이로 구분되어 있었다. 입주하면서 게이트맨 비밀번호는 바꿨지만, 손잡이까지 잠그기가 귀찮아 건너뛰기 일쑤였다. 집주인이 정말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없을 때 집에 들어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건가?     


그래도 세입자 동의 없이 집주인이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은 엄연히 형법상 ‘주거침입죄’다. 그녀가 집주인 생활 몇 년인데 그런 기본상식도 없을까 싶었지만, 이 사모님의 그간 무례함을 보면 만에 하나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이마트로 달려갔다. 비싼 게이트맨은 못 바꿔도 열쇠로 열리는 손잡이 문은 새것으로 교체했다. 위아래를 다 잠그고 다니면 적어도 집주인이 우리가 없을 때 우리 집 문을 여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 싶었다. 처음에는 내가 오버를 하는 건가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우였다. 그녀는 상식이 없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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