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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May 29. 2024

쓸모 없는 공부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9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실은 안간힘을 쓴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천루와 전봇대는

쓰러지지 않으려 진땀을 흘리고 있다     

평안은 뉴스가 되지 않으나

별일 없는 날을 나는 사랑한다     

행인들의 따분한 얼굴과

그들이 버티어낸 하루를 사랑한다

                                       <별일 없는 하루> 제페토



공부 100만큼을 한다면 성과는 그 절반에 못 미치는데 이런 공부는 해서 뭐하나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훅 밀고 들어오는 허무감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나처럼 절박함 없이 대체로 느긋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도 이런 기분이 들면 기분이 안 좋은데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들은 그런 정체감, 공허감이 들면 얼마나 괴로울까. 수험생, 공시생 들, 회사에 다니면서 끊임없는 연수와 승진 시험 공부를 해야 하는 이들, 그들에 비하면 즐거운 공부에 회의를 느끼는 건 사치다.


안 해도 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

어느 날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나이에, 안 해도 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를.

나는 매 시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초조해 한다. 물론 차가 막혀 어쩔 수 없이 정차하던 중 길가의 풀들을 바라보는 순간, 책을 읽고 스페인어 동사 변화를 외우고 오래 전 외웠던 시를 다시 떠올려 보며 잠들려 애쓰는 시간, 너무 피곤해서 티비를 틀어놓고 늘어져 있는 시간, 그럴 땐 아무 것도 안 하는 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그런 시간은 많지 않다.


나는 느린학습자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면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지만 뭐 대단한 걸 해내지는 않았구나, 깨닫는다. 나는 어쩌면 느린학습자인지도 모르겠다. 읽은 책 권수에 비해 머리에 남는 게 별로 없고 공부한 양에 비해 외국어 실력이 부쩍 늘진 않는다.

효율이 떨어지는 공부에 대해 나는 '즐거우면 됐지, 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건 100만큼 노력해서 100의 효과를 보는 일이다. 인생 절반 넘게 살아보니 그건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다 내 사주에 '공망'이란 게 있다는 걸 발견했다. 공망살은 말 그대로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되는 나쁜 요소이다. 그래서 그런 거라면, 이것은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내 운명에 공망이 끼어 있다면, 그런데도 100의 효율을 얻고 싶다면 내가 할 도리는 200, 혹은 300의 노력을 하는 것. 그리고 허사로 돌아가는 그 과정의 공부를 '즐기는 일'.


공망살로 공부하는 방법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0% 효율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도 차이는 있겠고 조금만 노력해도, 혹은 별 노력을 안 해도 잘먹고 잘 사는 이들도 없는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노력이 허사가 되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고 살 것이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  


여태까지는 공부와 독서에 명분이 있었다. 나의 직업에 이 공부들은 자양분이 되어 어디선가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내 직업에 영어를 써먹을 일은 없지만 영어로 된 책을 읽은 지성과 감성은 은근히 직업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터이다.

하지만 퇴직에 가까울수록 굳이 이런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까지의 지식만으로도 남은 시간을 잘해낼 수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쓸모 없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공부한다

모처럼 종이신문을 읽다가 대기업 퇴사 후 글쓰기를 업 삼으신 이병남 님 글을 읽었다. 그에게 헬스 트레이너가 "회원님,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했단다. 그래, 이것이 내가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에 꼭 걸맞는 말이다. 지금 이 나이에 하는 공부는 발전하고 성취하고 통과하고 합격하기 위한 공부는 아니다. 감각이 떨어져가는 뇌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말 많고 추레한 아줌마 혹은 할머니로 늙지 않기 위해다.


목소리만 큰, 적절한 품격의 언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중늙은이가 되지 않으려면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철학책도 읽고 시를 읽고 외국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음미하고 밴드음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악기들의 음색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줄인 말도,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이 등장하는 용어들도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꼭 발전해야 해? 

그런 깨달음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왜 늘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제자리에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공부를 한다는 생각은 허무하고 고단한가? 물론 어떤 사유로 이어지더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 가장 좋은 이유는 '재미있으니까!' 여야 할 것이다.


Qué Estudias estos días?

당신은 요즘 무슨 공부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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