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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Jun 03. 2024

이 새벽에 너무 맛있는 맥주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10

야행성 인간이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이 좋았던 건 밤새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합법적인 명분과 더불어 한두 시간의 시험을 마치고 집에 와 낮잠을 잔 후 밤에 또 깨어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사춘기 땐 밤새는 게 너무 좋았지만 어른이 되고 직장에 다니고 엄마가 된 후엔 그런 밤생활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직업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아침잠이 많고 밤에 쌩쌩해지는 내가 본성을 거스르고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야행성 인간, 아침형으로 살아가다

그런데 오늘은 남편이 1박 출장 중이다.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인 남편을 위해 밤늦은 독서도 조심스레 사그락거리던 내가 혼자 맘껏 밤을 즐기는 중이다. 만년필 세 개에 오렌지색, 나뭇잎색, 깊은바다색 잉크를 꽉 채우고는 음악을 틀어놓은 동시에 소리를 죽인 또 다른 유튜브를 보며 그림을 따라 그린다. 내가 그린 그림이 같잖아 실망하는 순간부터는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 문장을 따라 읽고 번역앱으로 단어도 찾고... 그러다가 브런치 글도 쓰고...


어느덧 새벽은 3시를 향해 간다. 

하루 걸러 맥주를 마시는데(술을 너무 좋아하는 내가 매일 먹지는 않으려 나만의 규칙을 세워놓았다) 어제는 즐거운 음주의 날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은 어제가 아니므로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 주로 토요일에 오전 11시 30분 경 첫끼니 때 맥주 한 캔, 저녁 때 또 한 캔 정도로 하루 종일 알콜과 더불어 지내지만 일요일엔 금주(禁酒)에 침대요가로 나름 건강한 생활을 하려 애쓴다. 지금 이 시간은 일요일의 새벽이므로 건전한 생활을 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어제는 (즐거운) 음주의 날

...만, 저녁에 딸래미와 나눠마시고 남은 냉장고의 맥주가 생각난다. 그립감 좋은 300미리 정도의 노*랜드 올리브 병은 밀폐력도 좋아서 우리집 생주스나 남은 맥주 보관용으로 잘 쓰인다. 가장 온도가 낮은 냉장고 맨 위칸에 반쯤 담긴 맥주를 꺼내와 내방에서 몰래 마신다(애들은 자니까). 세상에, 짭짤한 한식에나 어울리는 조금 싱거운 듯한 국산 맥주가 이렇게 깊은 맛이 있었던가?


la cerveza. 스페인어로 맥주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맥주!'라고 대답하는 나이므로 스페인어를 배우던 초입에 알게 된 이 단어를 좋아할 수밖에. 다만, 머리라는 뜻의 cabeza랑 좀 헷갈렸노라고 고백하는 바이다. 스페인어의 c(쎄,라고 읽어야 한다)는 a, o, u 를 만나면 까, 꼬, 꾸,라고 읽지만 e, i 앞에서는 쎄, 씨, 라고 읽는다. 그러니까  cerveza는 쎄르베싸, cabeza는 까베사이다. 맥주도 너무 많이 마시면 머리가 아프니까. 


모든 음식은 맥주와 어울린다 

- 내 제삿상엔(나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 할 것이니까 뭐 납골당이나 이런 데 날 보러 올 때, 가 맞는 말이겠다) 다른 음식 필요 없고 맥주를 꼭 가져오라고 아들 딸에게 말했다.

- 맥주 안주로 배추를 된장 찍어 먹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 것이라고 아들이 말했다.

- 세상에서 당신만큼 술을 맛있게 먹는 사람은 못 봤다고 남편은 말했다.

- 넌 아침부터 술을 마시냐고 엄마가 물어서 '주말엔 낮술이지'라고 내가 말했다.


스물네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5년 동안 강원도에서 자취를 했었다. 중간에 결혼을 하고 한 1년은 남편이 와서 같이 살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살았던 인생 개꿀 시절, 인구 4만 명밖에 안 되는 소도시에 서울서 온 처자가 혼자 살며 온갖 조신을 떨어야 했으나 참을 수 없었던 음주의 유혹 때문에 집 앞 수퍼에서 맥주를 야곰야곰 사다 마셨다. 그리고는 또 공병 환불의 유혹은 떨치지 못하고 빈병을 모아 부끄러워 하면서 새 맥주를 사러가곤 했다. 수퍼 아저씨가 '아가씨 맥주 좋아하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3초쯤 부끄러워하고 다른 데 맥주 살 데 어디 없나 3초쯤 고민하고 곧 잊었던 추억도 있다.


그 마을(사실 '도시'였다)에는 서점이 딱 하나 있었다. 서울에 못 오는 토요일 어느 오후, 그래도 시내 나들이라고 중앙통을 거닐다 서점에 들어가 책을 너댓권 샀다. 그 기분이 요즘으로 치면 목마른 자취생이 편의점에 가서 종류별로 만원에 세네 캔 맥주를 사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서점 건너편 레스토랑에 가서 돈까스 비슷한 걸 시켰나 보다. 


35년 전 난 이미 책읽는 혼술러였다 

그 주방에서 직접 만든 완두콩 스프는 꽤 고급스러웠던 걸 보면 제법 품격있는 양식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병맥주도 하나 시켰지. 가난한 사회 초년생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사치였다. 11월 창밖이 내려다 보이는 혼자 앉은 탁자에 방금 사온 책 댓 권을 올려놓고 맥주를 기다리며 책을 한권씩 뒤적이는 주말의 저녁. 

맥주를 가져온 내 또래의 웨이터는 '따라드릴까요?'라고 물었다. 35년 전, 시골마을에서 혼자 맥주를 시켜 마시는 스물댓 살의 여자애를 보는 일이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 글을 쓰며 시간은 3시 30분을 넘긴다. 내 생은 아직 진행중이지만 가끔 나를 잘 살게 해준 것들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구석자리에서 가장 따뜻하게 나에게 눈빛을 보내주는 술, 특히 맥주에게 꼭 감사를 표하고 싶다. 물론 잦은 음주는 나의 뇌기능을 떨어뜨리고 어쩌면 훗날 내게 치명적인 병, 기억력 감퇴, 주책, 어쩌면 알콜성 치매 등등을 남길지도 모른다. 수명을 5년 내지 10년 단축시킬지도 모른다. 그 중 알콜성 치매는 가족과 자식들에게 폐를 끼출 것 같아 두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 요소만 뺀다면 술아, 너 덕분에 나 살 수 있었다, 네 덕에 매일이 파티였다. 너 아니었으면 이 유리알같은 가슴으로 험난한 세상 어찌 기쁘게 살 수 있었겠냐고,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나에게 늘 따뜻했던 맥주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스페인어로 작문해 보면  yo queiro la cerveza. 하지만 번역기를 돌려보니 그건 맥주 주문할 때나 하는 소리였나 보다. Me gusta la cerveza란다. 이게 맞는 것 같다. gustar 동사는 취향을 말할 때 쓰니까. 하지만 나에게 맥주는 사랑의 대상이므로 '사랑한다'는 의미로도 쓸 수 있는 querer동사를 써도 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얼른  할  '한쿡어 초큼' 할 줄 아는 스페인어 권 친구(196,70년대 즈음에 태어나 한국어 배우고 싶어하는 스페인어 사용하는 아줌마 친구. 기왕이면 사춘기를  지나온/는 자녀가 있으면 더욱 공감대가 있을 듯(글로벌리하게 아들/딸 흉보며 ㅋㅋ) 를 사귀어서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표현'에 대한 수다를 떨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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