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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Jun 19. 2024

쿠바 바라데로, 바다는 아름다웠다만

오래 전 쿠바 여행 8

휴양지? 전국식자교육운동의 발원지!     

소설보다도 여행기 읽기를 좋아한다. 무거운 책에 머리가 짓눌릴 때쯤, 내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쯤 손을 뻗으면 영락없이 여행기를 집어 들게 된다. 왜일까?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행기를 즐겨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찌 보면 뻔한 곳, 뻔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출판가에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어디 먼 곳’에 가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산티아고의 크리스털 가게 주인(연금술사)’처럼 마음 속 멀고 먼 희망사항 중 하나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 그리고 그것을 새삼 다시 꿈꾸게 도와주는 것은 이미 다녀온 이들의 여행기이다. 이미 다녀왔기에 안전한 이야기, 냄새도 모기도 위험도 없는, 추억만 달콤하게 남아 있는 여행 이야기. 그게 함정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매력적인 게 여행기일 터이다.    

 

여행기를 쓰는 이유

여행기를 쓰면 여행을 두 곱절로 다녀오는 효과가 있다. 여행이라는 게 꼭 열흘, 보름, 다녀온 기간만의 경험이 아니지 않은가. 준비하는 기간의 즐거움이 두세 달, 그리고 다녀와 사진이며 증거물들을 들여다보며 반추하는 기간이 한 달여... 그 모든 시간이 여행인 것이다. 대개는 사진 몇 장 속에서 희미해질 여행의 추억이 ‘인생 공부’가 되려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좋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어딘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면 꼭 다녀오라고, 잘 다녀오라고 한다. 여행은 곧 공부라고도 말해 준다. 가면 꼭 얻어 오는 게 있는데 그건 그냥 추억이나 감성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막연하게 여행 전후에 만난 사람에게서의 배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여행 준비 과정에서 정보를 얻고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다녀와서 정리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그러니까 쿠바 여행기를 쓰는 것은 여행의 달콤함(나 자신도 글을 쓰면서 여행 동안 겪었던 불안감, 당혹감, 불쾌함을 제거한, 달콤함만을 반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진도 그렇지만 글에도 매연 냄새나 개똥 냄새는 안 나겠지?) 어쩌면 여행의 즐거움을 연장하려는 나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리브해... 비바람이 몰아치더라

아바나를 거쳐 간 다음 행선지는 ‘바라데로’라는 해변 휴양지였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놈의 ‘남들 다 간다는 유명한 관광지’를 건너뛰면 왠지 조금은 찜찜할 것만 같은 생각에, 그리고 한 번쯤 ‘비치 웨어’를 입어주어야 할 것 같은 스무 살 꽃처녀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려는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물빛이 아름답다는(나도 한국의 나폴리라는 강원도 삼척 동해 맹방 해수욕장 근처에서 5년 살아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닷빛이라면 조금은 아는 사람인데, 도대체 얼마나 바다가 아름답다고 그 난리인지 한 번 보고 싶기도 해서) 그 곳, 쿠바가 혁명에 성공하기 전 한때는 미국의 헐리웃 스타들의 별장이 즐비했다는 그 ‘바라데로’에 갔다.      

바라데로의 석양

하지만 이곳 이야기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 아침도 못 먹고 새벽버스를 타고 도착했지만 너무 일러 체크 인도 안 돼, 강풍이 몰아쳐 아침 먹으러 나갈 수도 없어, 옆 편의점에서 과자와 맥주를 사 와서 호텔 로비에 앉아서 낮(아침)술을 마셨건만 쿠바 과자가 우리를 실망시켜, 게다가 호텔에 짐만 맡기고 바다에 나가보려고 트렁크에서는 책을 안 꺼냈건만, 체크 인 하기 전에 짐만 맡겨놔서 읽을 책도 없어, 호텔 밖 화장실이 어마무시하게 더러워서 괜히 불쾌해져... 겨우 기다렸다 들어간 숙소가 축축하고 냄새나, 거실 문은 고장 나서 안 열려.... 총체적 난국이었기 때문이다.     


낮에 잠깐 비가 그쳤을 때 나가본 바다는 아름다웠고 저녁 무렵 산책한 동네도 참 아름다웠지만 해수욕이나 일광욕을 꼭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우리들은 굳이 바라데로를 갈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던거디어떤거디었따....  나중에 아바나에서 T3 버스를 타고 둘러본 퍼블릭 비치도 놀랍도록 아름다웠기에...   

  

병아리들을 이끌고 세계 최고의 휴양지를 활보하는 엄마닭

하지만 비 그친 후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네를 돌다 만난 닭과 병아리들이 우리 마음을 풀어주었다. 아바나에서도 비가 오자 병아리들을 날갯죽지에 품고 깃털을 한껏 부풀린 채 작은 나무 밑에서 비를 긋는 어미 닭을 본 적이 있다. 이곳의 닭들은 대개 방계(放鷄?)하여 키워진다. 동네 공터마다 닭들이 자기 병아리들을 이끌고 태연히 활보한다. 바라데로에서도 그랬다. 자그마치 여덟 마리나 되는 병아리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어디론가 가는 어미닭을 본 것이다.      


정말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돼 보이는 병아리들은 놓칠 새라 엄마를 열심히 쫓는데, 꼭 그런 애들 있지 않나, 한눈파는 애들... 여기서도 두 마리가 뒤처지는데 몸이 약해서 그런 건지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 꼭 둘만 뒤에 한참 처져서 삐약거리며, 그러면서도 엄마닭을 따라 간다. 그러다 글쎄, 난관을 만났으니, 인도와 차도 사이의 보도 턱에 이르렀을 때다.      


엄마는 ‘난 새끼들을 강하게 키울 테다!’ 이러는 건지 아니면 알아서 잘 따라오려니 믿는 건지 뒤도 안 돌아보고, 또 다른 병아리들은 다들 알아서 엄마 꽁무니를 잘 따라가는데 결국 제일 마지막 녀석은 그 높은 턱을 못 넘고 파닥댄다. 


길에 서서 우리 일행 쳐다보랴, 병아리 쳐다보랴, 한가롭던 동네 아저씨가 병아리한테 뭐라뭐라 말을 건다. 보도 턱 아래 풀섶이 있는데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키며 사람한테 하듯 뭐라고 말하는 걸 보니 병아리에게 그리로 가라고 하는 것 같다. 풀섶에 올라서면 턱을 올라서기가 조금 수월해지니까. 하지만 막내는 결국 풀섶에 올라서는 지혜를 발휘하지도 못했다. 엄마닭과 병아리 형제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아저씨는 손바닥에 꼬마를 얹어서 보도 위로 살며시 올려주었다. 별거 아닌데 괜히 따스하달까...      

그런 ‘자유영혼 방목(?) 닭’들을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본 풀씨(남편. 나 풀꽃 남편 풀씨, 우리 애들 풀들)는 식당에 가서 달걀이나 닭고기를 먹을 때마다 “이런 건 한국에서 못 먹는 거야, 이건 자연 속에서 놓아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이라고.” 이러면서 달걀 프라이를 3~4개씩 먹고도 “오믈렛 좀 해달라고 해.. 달걀 2개?” 이러고는 더 먹곤 했다는.....이야기이다.     


문해율 100%, 전국 식자교육운동의 불씨가 된 이 곳

풀씨는 바라데로의 해변도, 야자수를 휘감는 강풍도 다 시큰둥해 했지만 책에서 읽었다며 이곳이 ‘식자운동’의 제 1번지였음을, 어쩌면 우리가 묵고 있는 그 험난한 호텔도 그때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공부한 곳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혁명에 성공한 후 쿠바는 국민들의 ‘문맹’을 퇴출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지금도 놀라운 100%에 가까운 문해율(文解率)를 자랑하는 쿠바교육의 비밀이 여기 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런 쿠바의 교육방식은 2006년 제 17회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수상한다.)     

1960년 카스트로는 유엔총회에서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인류의 유산을 강탈당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전국적인 식자교육운동을 벌인다. 두메산골의 농민들을 위해 피델 카스트로가 선택한 전략은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운동의 동참을 간절히 호소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대학 다니던 시절의 ‘농활’과 비슷한 ‘문활’을 조직했던 것이다. 1961년 4월, 바라데로, 바로 그 ‘바라데로에 천 명의 학생 자원봉사자 1진이 찾아와 일주일 간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이 국가에서 받은 건 두 권의 책, 지도서와 학습서, 그리고 한 켤레의 신발, 두 켤레의 양말, 올리브 그린 색 베레모, 두 벌의 셔츠와 바지, 견장과 모포가 다였다고 한다.      


농활 아니고 문활

그렇게 ‘단기속성 교사(?)양성과정’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 중에는 15, 16세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혁명의 일환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얼마나 드높게 느꼈을지 상상이 된다. 그렇게 훈련받은 학생들은 골짜기, 골짜기 두메산골로 들어가 낮에는 농민들과 더불어 일하고 밤에는 랜턴 불빛 아래서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나는 여행 기간 내내 어쩌면 어딘가 닮아 보이기도 한 새마을 운동이나 ‘애향단’ 같은 파쇼적 국가주의와 쿠바의 ‘자발적 혁명과 개혁’에 대해 똑같이 반자유적이라고 닮았다고 비판해야 할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적 차이 때문에 다른 평가를 내린다면 어떻게 그 차이를 설명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당연히 나는 쿠바의 일련의 노력들에 감동을 받았고 어떻게 우리가 가져오고 배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는 두 조직 간의 그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해 내지 않으면 내가 쿠바에서 받은 감동을 누군가에게 설득력 있게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파쇼인가 열정인가

너희들 진영의 조직화는 파쇼이고 내 진영의 조직화는 자발적인 열정이었다, 라고만 말할 수 없는 그 차이... 물론 쿠바의 식자운동은 피델 카스트로의 피를 토하는 듯한 연설(그 자신도 이렇게 많은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줄은 몰랐다고 한)에 고무된 젊은이들의 참여가 이끌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그들이 활활 불타오를 수 있었던 그 동력, 그것이 무엇이었을지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80년대 20대 때의 열정의 기억들이 없지 않다. 쿠바의 식자운동을 읽다 보면 어쩐지 그 당시의 들끓던 가슴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만약 1960년대 쿠바의 10대였다면 나 역시 올리브 그린 베레모를 쓰고 두메산골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그 열정의 근원을 냉철히 짚어보지 않으면 쿠바의 역사는 그저 ‘부러운 역사’에 머물고 말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그런 열정은 필요한지,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혹시 왜곡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열정은 아픈 역사에서 오는 걸까? 아픈 만큼의 깊이를 지닌 열정인가?  단지 열정만이라면 쿠바의 식자운동과 그 외 여러 가지 개혁적 조치들마다 뒤따랐던 청년, 노동자들의 참여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누가 내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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