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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장난시계 Nov 07. 2023

나의 공직생활 연대기(2)

이장님과 친해지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지방직 공무원, 특히 작은 시/군 단위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직원들만큼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장님이다. 내가 초임 발령 난 면사무소는 7개의 리가 39개의 마을로 나뉘어 있었는데, 39개의 마을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이장님들이 한 분씩 있었다. 사실 공직에 들어오기 전까진 이장이라는 직책이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 하여 본가 바로 옆옆집에 거주하는 이장님의 얼굴을 몇 번 본 적도, 만나볼 생각을 한 적도 없었는데 막상 공무원이 되고 보니 오산이었다. 주민들한테도, 공무원들한테도 이장은 꽤 중요하다.


툭툭.


낯선 사무실에 처음 출근한 날, 잔뜩 긴장해서 자라목이 된 채 모니터만 응시하며 굳어있던 나의 등을 누군가가 터치했다. 깜짝 놀라 뒤돌아봤는데 얼굴이 새까맣게 탄 할아재(?)가 치아를 수줍게 드러내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왔어? 나 여기 이장이야."


앞으로 끈덕지게 보게 될 이장님과의 첫 인연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불안한 듯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대는 신규직원의 긴장을 풀어준답시고 기존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간단한 호구조사를 하거나 말을 걸면 불편해할까 봐 그냥 본인 일만 묵묵히 하는 등 각자만의 방식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 노력했지만, 실은 어느 것도 편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주면 걸어준 대로 안 걸면 안 건대로 둘 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신입의 숙명 같은 것이랄까. 그렇게 내내 어색함과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퇴근시간만 기다리던 햇병아리 신입의 긴장을 덜어준 사람이 바로 이장님이었다. 이장님의 무심한 등 두들김이, 마치 얼음땡 놀이에서 땡을 해준 것처럼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으레 물어보는 나이, 결혼 유무와 같은 스몰토크를 이장님과 나누며 관계의 물꼬를 트었다. 그 양반도 대화 몇 마디 해보니 서글서글한 내가 꽤 흡족한 눈치였다. 역시 나는 50대 이상과 미취학 아동, 노소에게 먹히는 타입이라니까. 알고 보니 면사무소 소재지에 거주하셨던 이장님은 사무실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분이었고 며칠 되지 않아 그 이장님과 나는 아침인사로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비록 그분이 내 담당마을 이장님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장님들이 좋았다.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이 'O주사~'하고 나를 존중해 주시는 호칭도 좋았고, 'OO이~'하고 아들 또는 손주 대하듯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도 좋았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몇 달 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고 살아계실 적에도 전혀 살가운 자식이 아니었기에(아버지도 굉장히 무뚝뚝하고 표현이 없었지만) 그에 대한 후회로 이장님들께 싹싹한 아들처럼 행동하며 더욱더 살갑게 굴었던 것 같다. 대부분 자녀들이 타지에 있다 보니 이장님들도 마치 자식인양 구는 나의 모습을 밉지 않게 봐주신 듯하다. 오래 있던 직원들이 인사발령으로 점차 떠나고 내가 면사무소 최고참(?)이 되었을 땐 사무실에 와도 본체만체하며 데면데면한 직원들이 많다며 귀여운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분들 때문에 난감한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하하. 사람마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데 이장님과 억지로 친해지라고 권할 수는 없지. 그래도 친해지면 분명 도움 되는 면이 많은데 말이지.


고령층이 많은 시골은 직원들이 사업이나 공고를 다이렉트로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개개인의 연락처를 다 꿰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생업으로 바쁜 노인 분들이 매번 컴퓨터로 직접 관보를 찾아볼 리도 없다. 하여 면사무소에서는 2주에 1번씩 이장회의를 열어 중요한 내용을 홍보했는데 이때 이장의 역량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을 사정에 밝고 주민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신 이장님들의 힘을 빌려 행정이 원활하게 이뤄진다. 책임감을 가진 이장님들이 발품을 팔고, 입을 쉬지 않고 놀릴수록 마을의 복지와 면민들의 행정에 대한 만족도는 상승한다. 나라에서 국민에게 항상 혜택만 주는 건 아니기에 간혹 민원인과 직접 얼굴 붉히며 언성을 높일 때도 있는데, 이때 이장님이 면사무소와 민원인 간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을 덮어주기도 한다. 나도 여러 차례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이장님들을 잘 '써먹었'다. 개중 가장 기억에 남고 고마운 일이 바로 양수기 해프닝이다.


몇 년 전 여름,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여름 내내 지속되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업무 분장과는 별도로, 면장님에 의해 면사무소의 재해 담당자로 찍혀 있었는데(물론 일을 못해서 못난 놈으로 찍혀있기도 했다) 날씨예보를 확인한 면장님이 금요일 퇴근을 앞두고 내게 말했다.


"우리 양수기 지금 몇 대 있지?"

"다섯 대... 가 있긴 한데, 한 대는 파손이 심해서 4대 사용 가능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다음 주 태풍 지나간다니까 상황 터지면 즉각 구동 가능하게 세팅해 놔. 시험 가동도 해보고."


젠장. 속으로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팀을 옮겼는데도 왜 재난 담당은 여전히 나인지 의문이고 왜 사전작업이라는 걸 하필 금요일 퇴근 시점에 꺼내는지 이해불가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저 즉각 가동을 시키는 준비과정이 꽤나 복잡하다는 것과 그걸 나 혼자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양수기는 간단히 설명하면 물을 빨아들이고, 그걸 배출해 내는 기계였는데 이 놈이 생각보다 예민(?)해서 하찮은 고무패킹이 조금이라도 헐겁거나 빠져있으면 백날 모터를 돌려도 물을 못 빨아들였다. 지난 폭우 때 몇 년 만에 양수기를 돌리다 보니 다들 구동법도 잘 모르고 허둥지둥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이 내내 맘에 걸리셨던 모양이라 단단히 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온전히 내 몫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하아."


주말에 혼자 나와 창고에서 무거운 양수기를 낑낑대며 끄집어냈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결합부는 제대로 말리지 못해 그새 녹이 슬어 호스 결합 자체가 안되었고, 몇 개는 시동조차 잘 걸리지 않았다.


X 됐다.


어디서부터 뭘 손대야 할지 암담한 그 시점에, 이장님 얼굴이 떠올랐다. 평일도 아닌 주말에, 그나마 나는 초과근무수당 푼돈이나마 챙겨가지 이장님은 뭐 하나 드릴 것도 없는데 염치없게 당장 내가 살고 봐야지 싶어 무작정 이장님 번호를 눌렀다.  뚜-뚜-뚜, 딸깍.


"OO? 주말에 어쩐 일이야?"

"... 이장님. 나 좀 살려줘."


전화를 받은 이장님은 한달음에 면사무소로 달려왔고, 오자마자 널브러진 양수기와 나를 발견하고 빠르게 사태 파악을 끝내었다. 걸쭉하게 나 대신 상급자 욕을 때려 박은 다음 본인 트럭에 양수기를 모두 싣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라곤 하지만 사실 이장님이 다 했다) 양수기 엔진오일을 갈고, 기름을 채우고, 녹을 벗겨내고 근처 개울가에서 시험 가동까지 하는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4대의 양수기 점검이 끝났을 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예고 없이 걸려온 무례한 전화 한 통에 온종일 구슬땀을 흘려내며 생고생한 이장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집에 가자."


그날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다음 주에 양수기를 쓰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풍이 다행히 비껴갔던가. 억울해서라도 생색 낼 법도 하건만 이장님은 평소처럼 면사무소에 오셔서 나와 시답잖은 농담만 주고받았다. 몇 번씩 보답하고자 했으나 이장님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곤 했다. 그렇게 약 2년이란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8급으로 승진해 본청으로 올라갔다. 면사무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업무 프로세스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에, 우연찮게 과장님이 OO이장님 얘기를 꺼내셨다.


"너 OO이장님 알지?"

"네. 면에 근무할 때 계셨죠."

"나도 좀 아는데, 인사발령 나고 전화 왔어. 아는 직원 승진해서 너네 과로 간다고. 애 괜찮으니까 잘해주라고."


감사합니다.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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