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편이라 생각하는 나도 솔직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암밍아웃이 그것인데.. 특히 '나는 안 그래'라고 떠들며 호박씨 툭툭 까서 내입하나 네입하나 맛있게 꼭꼭 씹으며. 이것은 절대 호박씨가 아니라면서 나누는 동네 언니동생을 목격해서인가. 그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분들만 만난 것은 아니다. 특정 소수 무리일 뿐.)
내 소식으로 괜한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게 하고 , 남편의 행색을 살피며 서로가 너도 알고 있느냐 그 호박씨 나눠 드실까 봐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고 싶은 세분 정도의 동네 엄마들이 있었다.
그간의 친분과 내가 겪은 그들의 인품, 또한 매일 겹치는 아이들 동선상 말을 해야겠다로 추려졌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고, 부탁하지 않았지만 침묵까지 지켜주어서 고마움이 배가 되어 있다.
그중 한 엄마는. 내가 특히나 신뢰했던 분이다. 아이들 교육이며, 살림의 지혜며,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수년이 되어가며, 특히나 외부 가족들도 안 만나던 코로나19 시절 서로의 아이가 집에 방문하며 수학 진도와 놀이를 계획 짜서 진행할 만큼 서로의 안전수칙과 여러 모로의 신뢰가 있었다.
내가 어렵게 잡은 숙소에 못 가는 일정이 되면 항상 1순위로 그 집 의향을 묻고 양도하고. 그 집도 나에게 많은 것을 내어주시던. 의지하고 진심으로 좋아하던 집이었는데 2년간의 일정으로 외국으로 가게 되셔서 어지간히 서운했다.
하필 내가 갑자기 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앞두고 입원 중이며, 우리 아이들은 친정부모님 손길 아래 여름방학 집콕 중인데, 그 집의 출국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 작별 파자마 파티가 학기중부터 방학에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고, 이것을 진행해야 할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알리기도 하고, 출국 인사도 미리 나누어야 했기에 소식을 전하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진심 어린 위로도 듣고 아이들 파자마파티는 알아서 데려다가 계획대로 진행하겠다고, 다시 인사를 나누기로 하였다. 마음이 포근하였고 후련했다.
그러나 결국 파티에 우리 아이는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하였고, 아이가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톡을 해도 받지 않는다 하며 병원에 있는 나에게 울며 전화가 오고, 왜 그럴까 싶어서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지 궁금했지만 일단 아이연락을 받지 않는다기에 나까지 섣불리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 싫으신가?'가 갑자기 나를 덮쳐서 기다려봐야겠다 싶었지만, 딸아이만큼 나의 마음의 상처도 깊어갔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약속 날짜가 지나갔고, 내 병원 생활 처량한 처지를 떠나, 아이를 전화로 달래주며 속상한 내 마음은 아이가 더 동조될까 숨겼다.
출국 전날에서야 톡이 왔다. 평범한 작별 인사였고 치료 잘하고 우리 건강히 만나자며, 궁금한 파자마티에는 아무 답이 없었지만, 나도 묻지 않았고 2년간의 헤어짐에만 집중한 작별 인사로 나도 마무리 지었다.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걷기 운동뿐이 살길이라 믿으며, 여름날 허리복대를 옷 속에 숨겨 차고 아파트 1층 그늘진 곳에서만 사부작 걸으면서도 , 땡볕 아래에서 무슨 큰일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듯한 나를 A어머니가 목격한다.
당황한 나는 갑자기 허리가 아픈 듯 손을 재빨리 허리춤에 올리며 "아 나 걷기 운동 중... 어디 가요?" 자연스러웠을까 재빨리 화젯거리 돌리기.
A어머니도 나와 꽤 오래된 사이고 가끔 차 마셨던 좋은 분이지만, 저분의 단짝이 내 취향이 아니기에 나의 암밍아웃에서 제외된 분이다. 그렇게 몇 번은 마주쳤을 때. 2학기 개학을 하였고 올게 왔구나. 나에게 등교 후 차를 마시자 하셨다. 이를 어쩌나 자꾸 마주치니 한 번은 나가서 차 한잔을 해야겠는데 내 얘기를 해, 말아?!
내가 이걸 이렇게 고민한 것은 이분이 처음이다. 결국은 이렇게까지 고민되는 것이 말하기 싫은 것이구나 결론내고, 하지 말기로 작정하여 약속 장소에 평소 안 하던 화장을 좀 하고 나섰다. 당시는 항암을 시작하기 전이라 얼굴이 항암빛도 아니고 난 멀쩡해를 장착했다는 착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
아프시다면서요...
그녀와 만나 들은 첫마디였다. 너무 놀라 얼음이 되고 머리가 댕 울린다.
"......... 아.. 어떻게 아셨어요...?"
'화를 내도 웃겨 침착하자'
"아 사실은 ㅇㅇ엄마께 들었어요...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ㅇㅇ엄마라면... 외국 간 그 엄마. 우리 아이 파자마 파티에 변명 한마디 없이 간 그 언니.
"그 집 출국하시는 날, 우연히 잠시 마주쳤는데 걱정을 많이 하시며 이야기해 주셔서 알았어요. 그래서 차 한잔 사드리고 싶었어요."
"아... 굳이 그 찰나에 제 걱정을요??"
입 밖으로 찰진 소리가 나와버렸다.
거참 내 걱정을 했다던 분은 본인 외국 도착해서 안부 한마디가 오기는 했던가. 나도 파자마파티 안 풀린 앙금으로 연락 안 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 분노가 일었다.
그 바빴을 출국날... 길에 서서 맥락 없이 다짜고짜 내 아픈 이야기를 잠깐 마주친 엄마에게 마구 흘렸다는 가벼움이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나에게 그간 두터운 신뢰감이 주었던 그녀가 그랬다고?? 정말 믿을 수가 없어서. 이 정도면 그냥 누구한테 소문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던 것은 아닌가 마구 분노가 일었다.
오히려 비밀 장착한 나에게, 모른 척 안 하고 솔직히 출처 밝히며 내 안부 물어주시는 A어머니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게 지금 어디까지 알려진 걸까? 눈앞의 A어머니와 그녀의 단짝과 무리들이 떠올라, 내가 생각했던 발 없는 말이 어디까지 지름길로 달려갔나 의구심을 품느라 대략 간단한 얘기만 나누고, 식단이 자유롭지 못해 식사까지는 못 한다며 마무리하였다.
집에 오는 길에 허탈함이란. 물론 1차적으로는 내 입에서 이야기가 나갔으니 이야기를 들은 후 상대의 제스처까지 상관할바는 아닌 게 맞다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나는 그냥 서운한 것이다. 인간적으로 많이 믿었나 보다.
그러나 내 맘 같지 않아도 품을 수 있을 만큼까지는 거기까지는.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나 보다.
우리는 서로 그냥 그랬나 보다.
할 수 없어 이러나저러나 남편과만 베프 되기로 다시 마음먹은 날이었다.
"그래, 사람 믿지 마! 하나님만 의지하는 게 제일 안전해. 난 사람은 아무도 안 믿어. 얘들아 너희들도 사람한테 의지하면 안 돼. 엄마 아빠도 다는 믿지 마~"
T오빠 가끔 헷갈리게 F감성도 있던데 애들한테 이건 또 뭔 소리.
"그래 맞지, 맞아."
아이들에게 우리를 믿지 말라는 말이 아프기는커녕 해결책을 찾은 듯 웃음이 났다.
"고마워! 그래도 우리끼리는 계속 신뢰하며 삽시다. "
이쯤 지나니 그래도 그녀가 돌아오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게 마음이 털어졌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무슨 말이던 내뱉는 순간 내 것이 아님을 배웠다. 한참 후에 그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잘 도착하였고 그간 바빴고 나의 안부도 물어주셨다.
이번에도 출국날 왜 다급히 A엄마에게 내 이야기하고 갔냐고는 묻지 않았다.
내 얘기가 어디까지 흘러갔건, 나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잊어야겠다.
내가 얻은 은혜 속 감사한 하루하루에만 집중해 보기로 하니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 또한 결은 다르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 아닌가 마음에 걸리는 한 명이 있다. 한때 내 기도 제목이었던 그녀는, 기도의 결실되어 우리 교회에 어렵게 발걸음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사생활을 알게 되고 내 기준에서 납득이 되지 않았고. 그 잘못된 길을 계속 즐기는 것을 보며, 내 무엇이길래 감히 그녀를 정죄한 것을 회개한다. 교회정착에 도움 주는 일에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 못하였고 그녀의 발길은 얼마 못 가 허무하게 끊어졌다. 다시 생각하니 내가 부족했구나. 경솔했구나. 눈치 빠른 그녀도 어쩌면 상처받고 간 건 아닐지..
멀지 않게 적절 한때에 하나님, 겸손히 그녀에게 다시 제 입술을 사용해 주세요. 계속 기도 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지. 나를 포함하여.
마흔이 넘어도 삶의 지혜는 배울 것이 아직 많구나. 암은 또 이렇게 하나의 지혜를 짙게 깨우쳐 주었다.
사진 출처-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