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이렇게 사는 거 다 엄마덕이야.”
“아닌데. 내복으로 사는건데.”
“좀 산다고 이젠 지복으로 산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엄마는 그냥 날 낳아만 준거고 사는 건 내 복으로 지금껏 살았지. 안 그래?”
“그래 니 팔자 니 복으로 살았다. 잘났다”
새초롬하게 삐친 엄마를 보면서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예전과를 전혀 다른 내 모습에 흠칫 놀랐다. 이렇게 엄마가 자기 덕에 살았다는 얘기를 하면 그저 납작 엎드려 ‘네 엄마 덕에 이렇게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복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전의 말들이 위선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주특기는 공치사다. 무슨 일을 하 든, 자신이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면서 그에 따르는 공치사 듣기를 좋아했다. 이를테면 외할머니 산소를 깨끗하게 벌초하는 것도 꼭 이야기하면서 그 덕을 알아주길 원했다. 하긴 엄마 쪽 족보가 좀 꼬이는 바람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제삿밥을 얻어먹고 계시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걸 꼭 나한테 얘기를 해야 하는지 가끔씩 의문이 들었다.
엄마의 친정집은 제법 잘 살았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그 일대 면장을 하면서 기와집에 살았다고 하니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글깨나 깨우치고 살았던 지역 유지였을 것이다. 엄마는 그 사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신다. 당신은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우리 집 뼈대는 이렇다라는 것을 넌지시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외할아버지는 공부에 큰 뜻이 없어 그냥 농사를 짓고 작은 할아버지가 도외지에 나가 공부를 했고, 그 자식들도 모두 공부를 가르쳤다. 작은 할아버지의 자랑인 큰아들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쫄딱 망해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할 줄 아는 기술이 안경을 고치는 일이었는데 하늘의 운을 모두 다 끌어다 그에게 갖다 줬는지 몇 해 시골에서 지내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엄청 큰 부자가 되었다. 서울 곳곳에 안경점이 있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풍백화점 안에도 매장이 있었다. 그 시절 안경은 몇 백 곱절 이윤이 남는 장사라 그렇게 재산이 불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아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L사의 한국지사장이 되었고 며느리는 국회의원 딸을 맞아들였다. 그야말로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