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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번역가 Nov 09. 2023

소금 주스와 '배불러요' (상)

27,415걸음으로 둘러본 하노이 시내

배부르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공부해 왔어야 했다.


9월의 어느 일요일, 나는 15시간째 이어지던 작업을 멈추고 베트남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11월 한 달을 하노이에서 지내고 돌아오는 표.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10월 말까지 숨 쉴 틈도 없이 몰린 일(내 탓이다)을 다 쳐내기가 무섭게 지친(내 탓이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몸을 끌고 한적함이나 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 하노이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되었으니까(이것도 내 탓이다). 뭐, 충동구매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느낀 하노이의 특징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쿠터가 많아 도로가 진짜 혼잡하다는 것. 이건 알고 있었지만 길 건너기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또 하나는 음식 1인분 양이 진짜 많다는 것. 길에 앉아서 먹는 삼만 동짜리 죽부터 박물관에 딸린 식당의 팔만 동짜리 볶음면까지, 뭘 먹어도 곱빼기 양을 준다. 맛이 없으면 적당히 배만 채우고 남기면 되지만 대부분 맛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면 나는 주 요리를 먹은 뒤 밥을 볶아 먹을 수 있는 식당에 간 한국인처럼 "배불러, 배가 터질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며 30분 넘게 자리에 버티고 앉아 음식을 다 먹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배부르다는 말이 베트남어로 뭐였더라? 분명 그 단어를 본 기억이 있다. 출국 전에 듀오링고라는 언어 학습 앱으로 벼락치기 공부를 할 때 잠깐 나왔다. 뭐였지? 한 음절짜리 형용사였던 것 같은데. Tôi(나) 뒤에 그 단어만 붙이면….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단어를 검색해 보지 않고 게으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 순간을 후회할 일이 생길 줄은 모른 채.



27,415걸음

하노이 여행 이틀째, 휴대폰에 축하 메시지가 떴다. 토요일 하루 동안 걸은 거리로 올해 신기록을 세웠단다. 하루 이천칠백 걸음을 걷는 경우도 많지 않은 나약한 사무직 프리랜서가 이만 칠천 걸음이라니. 하노이의 복잡한 거리와 나의 길치됨이 결합해 이뤄낸 쾌거였다.


사실 토요일에 내가 계획한 일은 딱 두 가지였다. ATM에서 돈 찾기, 그리고 그 돈으로 현지 유심 사기. 수중에 십만 동 약간 안 되는, 그러니까 길에서 두 끼쯤 사 먹을 돈과 1GB의 데이터 로밍을 신청해 놓은 휴대폰이 있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제였다.


숙소 근처 노점에서 표고버섯과 꿔이(튀긴 빵)를 넣은 삼만 동짜리 죽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걷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를 보니 가장 가까운 ATM이 12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12분은 아마 하노이에서 어려움 없이 길을 건널 수 있으며 방향도 잘 찾는 사람을 기준으로 나온 수치가 아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그 위치에 도착하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관광 중심지가 아닌 구역의 도로 사정은 길치 외국인에게 녹록지 않았다. 일단 웬만큼 넓은 길이 아니면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가 없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눈치와 용기만으로 건너야 했다. 횡단보도가 있고 보행자 신호가 녹색이어도 수많은 차와 스쿠터가 신호 따위 본 적 없는 것처럼 달렸다. 나는 최대한 길을 건너지 않고 인도로만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걷다 보면 인도가 없어졌으니까. 공사판이며 가게 앞에 주차한 스쿠터 따위에 막혀 길이 뚝뚝 끊겼다. 게다가 인도로 다니는 스쿠터도 많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걸을 수도 없었다.


건너야 할 길을 못 건너고, 원치 않는 길을 건너고, 잘못된 방향으로 걷기를 반복하며 찾은 목적지에는 ATM이 없었다. 나는 망연히 길가에 서 있다가 구글 지도 앱을 켜서 해당 위치에 별점 1점을 매긴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온몸에 땀이 흘렀다. 티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을 여러 번 확인하며 다시는 흰 티셔츠를 입고 하노이 거리에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층짜리 카페를 발견하자마자 들어갔다.  아침 겸 점심을 삼만 동에 먹고선 오만오천 동짜리 아이스티를 마시자니 좀 기분이 이상했지만 에어컨과 와이파이 값이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됐다. 열을 좀 식히며 구글 지도로 가까운 ATM과 통신사 대리점의 위치를 찾고, 이번에는 최근 리뷰를 통해 진짜 있는 곳인지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단 만 칠천 동, 한국 돈으로 약 팔백 원.



이번에는 다른 전략을 세웠다. 구글 지도로는 대략적인 방향만 확인하고 최대한 쭉 걸으며,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 따위는 무시하고 무조건 현지인이 길을 건널 때 따라서 건너는 것. 물론 잘못된 전략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그 좁은 길로도 스쿠터가 다녔다. 잊을 만하면 울리는 경적 소리에 몸을 이리저리 구겨 비키며 길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걸었다. 길을 잃은 건 확실했지만 동네는 참 예뻤다. 폭이 좁은 3~4층짜리 건물과 작은 식당, 주스 가게 사이로 나뭇잎이 상쾌함을 더했다.


사진을 찍으며 골목을 통과하다 '하노이 문화 대학교'라는 기관을 발견했다. 다시 구글 지도를 켜고 문화 대학교를 랜드마크 삼아 길을 찾은 결과 마침내 골목을 벗어나 큰길가 ATM에서 이백만 동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아무 통신사 대리점에나 들어가 현지 데이터 유심을 사면 끝이다. 돈과 인터넷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니까.



물론 통신사 찾기도 쉽지 않았다. 롯데리아를 세 번 지나쳤다. 같은 장소를 빙빙 돈 게 아니고 이동 거리가 길어 지점 세 개를 본 것이었다. 하노이에 롯데리아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중간에 또 한 번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까보다는 트였지만 그래도 좁은, 그러나 역시 예쁜 골목을 걷다가 그네와 흔들목마가 있는 작은 놀이터도 발견했다. 어린아이가 타이어 그네를 타는 놀이터 바로 옆의 노상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또 현지인을 따라 길을 건너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모비폰 대리점을 발견했다. 분명 세 번째 롯데리아에서 검색했을 때 가장 가까운 통신사 대리점은 비엣텔이었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새 유심 값과 데이터 요금제 값을 합해 십칠만 동. 이제 나는 돈에 이어 인터넷까지 얻었다. 더위를 식힐 수만 있으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카페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다가올 소금 주스의 운명을 모른 채.




(하) 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omadboa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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