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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번역가 Nov 20. 2023

베트남에서 길 건너기가 그렇게 어렵냐고?

오토바이의 급류 속에서 살아남기


결국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의 도로 상황은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륜차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많고,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는 찾기 어려운 데다 있어도 차들이 잘 지키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한국으로 따지면 건널목 앞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는데 비보호 우회전 차량 여러 대가 일시 정지도, 서행도 하지 않고 끝없이 꼬리를 물며 달려 들어오는 것 같은 상황이 모든 방향의 모든 도로에서 일어난다. 


수많은 오토바이가 한 걸음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끝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길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이 되면 차들이 일단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환경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나약한 한국인에게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하노이 거리에 처음 나선 날에는 길을 마음대로 건너지 못해 헤매다가 하루에 20km 넘게 걷기도 했다(https://brunch.co.kr/@nomadboar/2).



그 뒤로도 한동안 길 건너기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하노이는 구글 지도가 정확하고 업데이트도 잘 되어 있지만 길을 마음대로 못 건너서야 지도 앱이 아무리 좋아도 의미가 없다. 길을 잘 건너거나 길 건너기를 회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결국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에서 길 건너기


큰 도움은 안 되는 방법

  현지인 따라 건너기

  3보 이상 택시

  막무가내로 뛰어들기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

  빈 곳으로 가기

  일정한 속도로 걷기

  교통 체계 활용


마치며




오토바이로 가득한 하노이의 교차로



큰 도움은 안 되는 방법



현지인 따라 건너기


길을 건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시도한 방법은 길을 건너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현지인이라면 이 혼란 속에서도 잘 다닐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남을 따라가면 길을 건너는 순간의 불안감은 줄지만, 그 사람의 행선지가 나와 같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단점이다. 내가 따라가던 상대가 퇴근 시간 왕복 6차선 도로 한가운데서 자기 일행을 만나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 버리고 나 혼자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 한가운데 서 있는 경험을 한 후 이 전략을 포기했다.


하지만 '따라 건너기'는 제한적으로 활용하면 도움이 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내가 건너야 하는 길을 마침 다른 사람이 능숙하게 건너는 걸 보고도 따라가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3보 이상 택시


베트남은 한국에 비해 물가가 저렴하다. 그래서 택시 요금도 저렴하다. 나는 이 점을 이용해 길을 건너는 두려움을 회피해 보려고 했다. 즉, 가까운 곳에 갈 때도 택시를 불렀다. 숙소 근처 도이칸에서 일하기 편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는 낌마까지 걸어서 15분 거리를, 예약하고 기다리는 시간까지 해서 똑같이 15분이 걸리더라도 택시를 타고 다니는 식이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도 길을 건너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하노이에는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내가 부른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야 하거나, 택시에서 내리고 보면 목적지 건너편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결국 혼잡한 도로에 맨몸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



막무가내로 뛰어들기(XXX절대 하지 마세요XXX)


겁이 많은 사람이 더는 두려운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떻게 될까? 내 경우 그 순간부터 간이 커진다. 거기에 약간의 오해가 더해지면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샐틈없이 오토바이가 가득한 도로를 산책로마냥 자연스레 건너는 하노이 사람들을 보고 나는 잘못된 추론을 했다. 그냥 아무 때나 사람이 도로에 들어가면 차가 알아서 서거나 피하는 시스템이구나(틀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빠르게 달리는 차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은 건 내가 지레 겁먹고 도로에 발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구나(반만 맞았다). 그렇다면 나도 언제든 건너가고 싶을 때 도로로 막 밀고 들어가야지(완전 틀렸다)!


아 ㅋㅋ 칠 테면 쳐 보든가 ㅋㅋ


이틀 정도는 목숨을 내놓고 다녔다. 아, 치든가. 여행자 보험 들었거든. 대충 휘휘 둘러본 뒤 도로에 뛰어들어 놀란 운전자들의 경적 소리를 축포처럼 즐기며 길을 건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행인의 시선을 느꼈다.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와, 쟤 정말 죽을 뻔했다."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아, 이거 아니구나. 그렇게 '막무가내' 전략을 버렸다. 다만 그러고 살아도 치이지는 않았으니 길을 건너는 것을 너무 겁내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만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하노이의 운전자 여러분,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


그래서 길을 건너는 다른 사람들을 더 자세히 관찰해 봤다. 세로로 건너다 말고 가로로 이동하며 빼곡한 오토바이 사이를 스르륵 지나가는 사람부터 두 팔을 들고 마구 흔들며 자신이 지금 길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사람까지 다양하지만 그래도 공통점이 있었다. 차 사이에 빈틈이 생겼을 때 놓치지 않고 도로의 빈 곳으로 내려선 뒤 일정한 속도로 걷는 것. 그렇게 하면서 주변의 교통 체계를 잘 살피니 하노이 사람들만큼 능숙하지는 않아도 큰 불편 없이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빈 곳으로 가기


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건널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인도에서 차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길을 반은 건넌 거나 다름없다. 차도 중 인도에서 가장 가까운 차선이 비었을 때 내려서서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비었다'는 것은 내가 내려설 공간이 충분하며 다음에 오는 차가 속도를 늦추면 나와 충돌하지 않을 만큼의 안전 거리(차 반 대 간격 정도)가 확보되었을 때를 말한다.


그 다음, 다다음 차선도 비어 있어야 하지 않냐고? 하노이에 그 모든 차선이 동시에 빌 정도로 한적한 도로가 많았다면 길 건너는 법에 대해 글까지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단 차도에 사람이 있으면 차가 알아서 속도를 조절하니 갑자기 뛰거나 하지만 않으면 무사히 건널 수 있다. 도로가 너무 혼잡해 아예 나아갈 수 없는 경우에는 첫 차선에 선 채 다음 차선에 빈 공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인도에 붙은 차선에 한순간도 빈틈이 생기지 않아 내려설 수 없다면 교통 흐름 상 길 건너기에 적합하지 않은 위치일 수도 있다. 신호등(보행자 신호가 아니어도 좋다)이 있는 곳에서 건너면 타이밍 잡기가 좀 수월하다.



일정한 속도로 걷기


일단 차도에 내려섰다면 최대한 운전자가 예측하기 쉽게 움직여야 한다. 보행자가 움직이는 방향과 속력이 변수가 아닌 상수여야 안전하다. 갑자기 뛰거나 속도를 높이면 안 된다. 내가 가기 전에 빨리 지나가겠다는 의사를 확연히 보이는 차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멈추지도 않는 것이 좋다. 나는 차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멈췄다가 오히려 부딪칠 뻔한 적도 많다.


특히 오토바이 운전자들에게는 차선 개념이 거의 없다. 앞에 보행자가 있으면 깜빡이도 안 켜고 비스듬히 피하며 지나간다. 오토바이가 나와 한 뼘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가는 상황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교통 체계 활용


위의 두 가지 요점만 잘 익혀도 문제없이 길을 다닐 수 있겠지만, 사실 내게는 어려운 전략이다. 주변 상황을 파악해 적당한 시점에 출발해서 수많은 운전자와 비언어적 소통을 하며 차 사이를 지나가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눈치껏' 길을 건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국에서도 없던 눈치를 타국에서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하노이의 도로 상황에 익숙해질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에게는 부족한 기술을 보조해 줄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찾은 또 다른 팁이 바로 관광지 주변과 넓은 도로에 있는 교통 체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통 체계를 따르는 것이 기본 원칙이고 눈치와 순발력은 부차적인 덕목이었다면,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차의 흐름을 살피면서 횡단보도와 보행자/차량 신호를 추가적인 단서로 활용하면 좋다.


보행자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라도 보행자 주의 표지판이 있으면 조금 더 편하게 건널 수 있다. 그 뒤의 표지판은 공사 안내문. 


먼저 여행자에게 좋은 소식 하나. 번화가나 주요 관광지 주변에는 횡단보도가 비교적 많다. 횡단보도가 있어도 차들은 거침없이 달리지만, 그래도 없는 곳에서보다는 사람이 지날 때 좀 더 간격을 두고 기다려 준다. 특히 관광지 주변의 보행자 신호나 보행자 주의 표지판이 있는 횡단보도에서는 차들도 더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래도 차가 오는 방향을 주시하며 갑자기 뛰거나 서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걸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넓은 교차로에서 횡단보도에 보행자 신호가 없는 경우(흔하다) 차량 신호를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노이의 차량 신호등에는 대부분 신호가 바뀔 때까지 남은 시간이 초 단위로 표시된다. 가령 내가 건널 횡단보도와 평행한 방향의 차량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고, 수직한 방향(즉 차가 길을 건너는 나를 받을 수 있는 방향)의 정지 신호가 30초 남았다면, 보행자 신호가 없더라도 편하게 건너며 비보호 회전 및 신호 위반 차량만 조심하면 된다.


하노이에는 일방통행로가 많다. 3~4차선의 넓은 도로도 일방통행인 경우를 많이 봤다. 차가 한쪽에서만 오면 이리저리 둘러보지 않고 한쪽만 살펴도 돼서 편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다니는 동네에서 일방통행로 위치를 기억해 뒀다가 일부러 그쪽으로 다니고 있다.




마치며


처음 하노이에 도착했을 때 대로를 인정사정없이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 도시의 도로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1주일쯤 보내고 나니 조금 뚝딱거리기는 해도 큰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길을 건널 수 있게 됐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이제 관광지 주변의 건널목에서 전전긍긍하다 나를 따라 건너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래 건널목 꼰대 연기를 하며 '쯧쯧, 나약한 외국인들 같으니.' 따위의 대사를 읊을 정도의 여유도 생겼다.


너희는 이 건널목이 힘드니? 신호 없는 왕복 6차선 도로 건너다 오니까 여기쯤은 달달한 음료수 같다...^^


물론 그들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대부분 나보다 겁이 없고 눈치가 빠를 테니 나보다 훨씬 빨리 길 건너기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노이의 운전자들을 믿으며 자연스럽게 걷다 보면 눈치껏 어떻게든 되니까.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떻게든 다 살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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