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 내려놓고 다른 영혼으로 생각하느라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영향을 받는다.
-에픽테토스
저녁부터 시작하더니 밤새 40도 가까이 열이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느라 비몽사몽이었다. 다음 날 찾아간 병원의 수액실은 이미 만석이었고, 급한 대로 진료대기실 한쪽에 눕혀 수액을 맞히고는 아이 옆에 앉아 의사도 못 찾는 원인을 찾고 있었다. 짚이는 건 그것뿐인데..
결론도 못 내린 채 어서 열이나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잠이 든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람. 그렇잖아도 아픈 아이 이런 곳에서 주사를 맞게 하고, 어쩔 수 없다지만 속상하네.. 그러는 중에 하나 둘, 우리 애처럼 대기실 한쪽, 긴 의자 두 개를 붙여놓은 곳에 누워 수액을 맞는 아이들이 늘었다. 이 쪽 구석에 한 명, 저 쪽 구석에 또 한 명. 모두 다섯. 자주 왔던 사람들인가? 이 광경이 익숙한 건가? 아이들 옆에 앉은 엄마들은 그저 평온해 보인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긴 애가 아픈데 어디에 눕히건 우선 주사라도 맞힐 수 있으면 다행이지. 간호사들도 미안함 때문인지 고열에 힘들어하는 아이가 안쓰러워서인지 말 한마디, 손길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고 안타까워해 주셨으니 고마운 일이야.
수액을 반쯤 맞으니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색도 돌아온다. 휴.. 꽉 조이고 있던 브래지어 후크를 풀어버린 기분이다. 이대로 다시 열이 안 오르면 좋겠네.
긴장이 풀리면서 아이만 보고 있던 눈은 휴대폰을 향했다. 잠깐 사이 아이의 정맥이 링거액을 쭈욱 빨아들였는지, 아니면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느라 도끼 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다던 나무꾼처럼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특수 상대성 이론을 경험한 건지, 어느새 간호사가 주사를 빼러 왔다. 잠이 들었던 아이도 깼지만 그대로 더 누워 있으라 하고 병원비를 계산하러 갔다. 47400원. 뭐가 이리 비싸? 전에 살던 동네보다 훨씬 비싸네? 진료도 대~충 보더만.. 여긴 아닌가벼..
날도 샜겠다, 긴장이 풀어져 터덜터덜 처방전을 들고 간 약국. 기다리는 동안 목 통증을 줄일만한 상비약을 물으니 아이에겐 그냥 사탕을 주란다. 나이 조건이 맞지 않아 스트렙실은 안 된다며. 그러고는 요즘 에어컨 때문에 편도가 부어 열이 나는 아이들이 많다고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환기도 자주 시키라고 당부한다. 등교시킬 때는 바람막이도 챙겨 보내라는 살가운 조언과 함께. 이어서 내게서 아이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 목 아파도 차가운 거 먹으면 안 돼요~ 그리고 덥다고 너무 시원하게만 하면 얼른 안 나아요. 불편한 거 조금만 참으면 대신 빨리 나을 거니까 다 나은 뒤에 하기로 하고 조금만 참자 "
환자는 따로 있는데 내가 다 나은 것 같다. 아까 그 의사가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40도가 다 된 상태로 진료실에 걸어 들어온 게 신기하다며 비아냥대는 것 같던 의사 말에, 내가 뭘 잘못했는지 대체 뭐가 이유인지 고민하느라 숨도 크게 못 쉬었을 일은 없었을 거 아닌가.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전날 했던 아이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엄마 오늘 너무 추웠어"
담임선생님의 부재로 하루 들어오신 체육 선생님께서 남학생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에어컨 설정 온도를 확 낮춰주셨고 바람막이도 소용없이 한여름에 추운 하루를 보내고 왔던 것이다. 평소 FM인 담임선생님께서는 내내 25~26도를 유지해 오셨던 터라 아이는 그 교실에 적응해 있었는데, 갑자기 종일 냉기와 싸우고 온 후유증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체육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전에도 애들 체력 키운다는 명분으로 발이 아프다는 아이들이 여럿 나와도 계속 달리게 해서 결국은 병원치료를 받게 하더니 사람 참..
체육선생님을 앞에 두고 덩치가 훨씬 커진 내가 따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택시 기사님이 끼어든다.
"병원에 애들 많죠?"
"네 많더라고요. 요즘 열나는 애들이 많다네요."
"요즘 애기들이 귀하게만 커서 그런지 면역력이 약해 그런 것 같아요. 한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올여름 아픈 애들 병원 데리고 가느라 택시 부르는 엄마들이 많네요"
그건.. 그렇지.. 아무리 에어컨 온도를 낮춰서 추웠다고 해도 반에 있는 아이들이 다 편도가 붓고 열이 나진 않았겠지. 면역력 차이야. 더 신경 써야지. 먹거리, 자는 시간. 체육선생님 때문에 애 발이 아파 병원에 다니긴 했지만 덕분에 아치가 약한 것도 알았으니 다행인 거지.
컨디션이 괜찮아진 아이는 진료확인서를 들고 등교를 했다. 다행히도 학교에서 더는 열이 나지 않았다고 했고 그날 밤에도 그다음 날에도 열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비싸다고 했는데 돈값했나 보네.
그런데 아이는 그 뒤로 잘 먹지도 않고 축축 쳐지기만 해 결국 어느 늦은 오후 다른 병원에 데려갔다. 이런저런 검사와 수액처방으로 98500원을 쓰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하.. 이 동네는 병원만 가면 몇 만 원이 우습구나.. 그래도 이제 좀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며칠 동안 하교 후, 아이는 내내 잠만 잤다. 낫느라 힘든가 보다. 피곤했나 보다.. 혹시 학교에서도 저랬을까? 담임선생님께 여쭤보니 안 그러던 애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어서 그대로 두었다고 하셨다. 약 때문인가 싶어 주변에 사는 지인에게 다녀왔던 병원에 대해 물으니 그곳은 절~대 가지 말란다. 과잉 진료에 약도 저렴한 걸 쓰거나 아주 쎈 걸 써서 재운다며.
이럴 수가.. 의사는 원래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치료에 우선을 두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내 경험에 기준하여 대충 진료를 봤던 그 의사가 차라리 양심적인 거였나?
같은 일을 두고 생각이 바뀌는 일이 많다. 순간 느껴지는 감정에 생각이 따라가고 그로 인해 괴롭거나 서운하거나 화가 나기도 한다. 시간이 좀 지나거나 누군가 툭 건드려 주면 곱씹던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다고 매번 반성을 하거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모든 것이 넘어가지는 건 아니다. 난 성인군자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똑같은 상황, 똑같은 나 임에도, 눈앞의 물체를 살짝 틀어서 보면 다르게 보이듯 한 발짝 옆으로 가서 보면 그렇게 속상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음이 그제야 보이기에 생각 되새김질은 계속한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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