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너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말』 문장을 읽고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영향을 받는다.
-에픽테토스
(김종원, “너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말” 중에서)
일곱 살 꿍이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는다. 손에 비누를 두어 번 문지르고 손바닥을 싹싹 비벼 거품을 만들었다.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면서 하나, 둘, 셋...... 삼십까지 숫자를 센다. 그런 후 잘 씻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도꼭지를 잠갔다.
얼마 전, 꿍이는 유치원에서 손 씻기 교육을 받았다. 손을 잘 씻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의기양양하다. 한 번은 내가 손 씻는 것을 보더니 그렇게 씻으면 안 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손톱 밑까지 싹싹 문질러야 한단다.
엄마, 거품을 낸 뒤에는 삼십 초가 지날 때까지 헹궈야 돼. 그래야 비누가 손에 남지 않는 거야.
열심히 잘 배운 건 좋은데, 엄마는 조금 걱정스럽다. 손 씻기 규칙을 너무 잘 지키려고 해서다. 아이는 손을 씻을 때마다 삼십 초씩 숫자를 셌다. 꼼꼼히 잘 씻으면 상관이 없는데, 아직 비누 거품이 손목에 남아 있는데도 삼십 초가 지나면 물을 꺼버릴 때도 있었다.
손 씻기 교육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꿍이는 손을 씻을 때마다 여전히 숫자를 세고 있다. 집이든 밖이든 혼자 있든 뒷사람이 기다리고 있든, 꿍이는 삼십까지 세고 나서 손 씻기를 마쳤다. 꿍이에게 꼭 삼십 초까지 안 헹궈도 된다고, 비누 거품이 사라지면 적당히 헹궈도 된다고 얘기해 주었지만 엄마의 말보다 선생님의 말씀이 더 강력하다. 저러다 강박증이 되는 건 아닌가. 별일 아닌 것에 엄마는 걱정과 불안을 담는다.
꿍이는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 숫자를 세면서 씻느라 손을 더 깨끗이 씻을 것이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습관은 좋은 것이니까. 아이에게 불편함이 없으면 되는 건데.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마음이 옹졸해진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선생님 말씀이라면 꼬박꼬박 들었고,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일이더라도 규칙에 어긋나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정해진 대로 바로잡아야 마음이 편해졌다. 꿍이도 나처럼 규칙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어릴 때는 배운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세상이 정한 대로 따르며 지내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모두가 옳은 이야기라고 말하더라도 의문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할 줄 아는 사람이 멋져 보였다. 아이 또한 정해진 대로 따르기보다는 깊이 생각하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는 걸. 일곱 살 아이의 습관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내 경험과 생각을 넣어서 아이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스스로 깨우치고 알게 될 것이다. 내 불안함을 아이에게 투영하지 않아야지. 열심히 손을 씻는다면 그 모습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게 엄마로서 할 일이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가 손을 씻을 때 나쁜 세균이 없어졌겠다고 칭찬을 듬뿍 해줘야겠다. 아이가 손을 내밀며 뿌듯한 표정을 지을 모습이 벌써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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