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천천히 찾아왔다. 9월부터도 눈이 내리는 동네에서 11월 초에야 첫눈이 날렸으니.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11월 말, 때이른 폭설이 들이닥쳤다.
늦잠 자고 일어난 토요일 아침, 눈은 소리 없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부슬부슬,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내리는 지도 모르게 자잘한 진눈깨비일 뿐인데 그 상태로 밤새 내렸는지 현관 계단에, 난간에, 식물이 말라죽은 화분 위에, 백야드 탁자 위에 수북이 쌓였다. 밖에서는 눈삽으로 드라이브웨이를 득득 긁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도 얼른 나가서 치워야 할 것을 알지만, 조금 더 침대에서 꾸물럭거린다. 그새 남편이 올라와 따끈하게 덥힌 자리를 내주려 했지만, 온콜이라 이미 바깥옷을 입고 있다고 사양한다. 그래도 날 보러, 아침 인사를 하러 이층까지 와 준 마음이 고맙다. 눕지는 못했지만 침대 아랫목을 내주려 했던 내 마음도 전해졌기를 바라본다.
30cm는 족히 쌓였을 눈 때문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아침 운동을 취소한다. 일단 운동을 하고 나면 내가 왜 운동하러 나왔느냐며 후회하는 일이야 없겠지만, 지금은 느긋한 주말 아침이 더 소중하다. 잠을 깬 다음에도 한참 미적거리다 몸을 일으켜보니 고양이들이 모두 침대에 모여있다. 누구라도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아침. 저희들 몸이 털가죽을 둘러 그렇게 보드라운 데도 역시 보드라운 게 좋은지, 극세사 요 위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1차 치크케이크, 2차 된장국수. 두 차례에 걸쳐 아침을 먹는다. 날은 춥고 곧 빡세게 쌓인 눈도 밀어야 한다고 과식을 정당화하면서. 입맛 돌 때 먹는 게 제일이다. 소화가 안 되고, 먹고 싶은 의욕도 없으면 시름시름 앓는 수밖에 없다. 소화불량은 참 만악의 근원이다. 다들 잘 먹고 기운을 차리라는데 일단 그 시작점인 잘 먹기부터가 안 되니까 답이 없다. 다행히 오늘은 밥도 잘 먹히고, 고질병인 허리 디스크도 웬만하니 눈 치우러 갈 만반의 준비가 된 것 같다.
모자 쓰고, 패딩 입고, 부츠 신고. 중무장을 한 뒤 차고 문을 열었더니, 일 나갔다 어느새 돌아온 남편이 눈을 치우고 있다. 주말인데도 일한다고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솔선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얼른 뛰쳐나가서 부지런히 삽질을 했다. 혼자 하면 20분은 걸렸을 작업인데 같이 했더니 8분만에 끝이 났다.
침대의 소중함,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입맛이 살아나는 계절. 군고구마니 잣죽이니 먹어야 할 메뉴 목록이 길어진다. 이대로라면 겨울도 나쁘지 않다. 폭설도 견딜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