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의 <경청>을 읽고
우리는 언어로 자신의 마음, 내면, 진심을 얼마만큼 표현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작년부터 이어진 물음인데, 최근 내가 내린 결론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온전하게 표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p.9 “이 편지는 부족하다. 이런 단어로는. 이처럼 예의 바르고 매끄러운 형식으로는 자신의 심정을 전달할 수 없다. (...) 이런 평범한 단어와 문장으로는 자신을 수시로 덮쳐 오는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역부족이다.”
p.16 “신중하게 고른 단어들을 징검다리처럼 하나씩 내려놓다가 마침내 무수한 단어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마는 행위”
p.123 “그녀는 말로, 언어로, 아이를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 그녀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작 깨달아야 했을 말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p.170 “그녀는 갇혔다고 느낀다. 수많은 말 속에. 의미와 맥락이 무한히 확장되고, 왜곡되고, 중첩되는 언어 속에. 결코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리키지 않는 모국어 속에. 어쩌면 그녀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다른 언어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적절한 단어를 찾고 완전히 낯선 배열을 통해 반박이라 할 만한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48 “그녀는 마음속으로 여자에게 썼던 모든 편지를 폐기한다. 정확한 단어로, 분명한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 안의 말들을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침묵 속으로 던져 버린다.”
마음에는 실체가 없고 언어에는 실체가 있다.
무형을 유형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유실된다.
그렇기에 추상명사라는 것은 대게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르게 각인되어 있다.
감정명사는 그 갭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감정이라는 게 개인의 경험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슬픔”이 다른 이의 “슬픔”과 같은 무게일 수 없고, 형태와 결 또한 매우 다를 것이다. 같은 언어가 담아내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니 누군가의 내면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유동하는 내면 심리를 '자신만의 언어'로 그려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분출되는 생각과 감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돈하여 담아내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내면의 감정은 외부로 표현되는 순간 곧바로 퇴색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