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무학교 학습일지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오늘은 토종과일나무학교에서 복숭아농장에 견학 가는 날입니다. 농장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정도령 복숭아농장입니다. 달콤하고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어서 기대가 컸습니다. 그 외에도 복숭아를 자연재배한다고 하여 많이 기다렸습니다. 자연상태에 그냥 놔두고 키워도 탐스러운 복숭아가 잘 열린다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같이 수업을 듣는 장선생님이 차를 태워줘서 편하게 이원면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이원면의 위치가 충청북도의 북부인 음성군 부근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차는 대전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대전에서 무주 가는 방향입니다. 그러고 보니 무주 가는 길목에 옥천이 있고 그 아래에 이원면이 있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이원면 면사무소 앞입니다. 면사무소 건물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예산에서 8시 10분경에 출발했으니 1시간 50분 정도 걸렸습니다. 기차를 탔더라면 중간에 환승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3시간 넘게 걸렸을 텐데 편하게 잘 왔습니다. 요즘은 장마철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원면은 그야말로 생전 처음입니다. 면사무소 뒤쪽으로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면사무소 간판에 '전국 제일 묘목의 고장'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복숭아 밭 견학도 견학이지만 이곳이 전국 제일의 묘목 고장이라니 이번 견학에 참가하길 잘했습니다. 내년 봄에는 직접 이곳을 방문하여 묘목을 사야겠습니다.
왜 이원면이 묘목의 고장이 되었을까? 얼른 드는 생각이 이곳은 우리나라(남한)에서 정중앙입니다. 남북으로 봐도 중앙이고 동서로 봐도 중앙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키운 묘목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 않을까, 그래서 묘목의 고장이 된 것을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묘목 살 때는 그 점이 항상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인 대전에 가까워서 전국적인 유통에 유리한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덧 약속한 10시 30분이 되어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습니다. 나무학교 학생들 그리고 토종과일나무모임 회원들 모두 20여 명이 넘게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면사무소 앞에서 출발하여 남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복숭아 농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 복숭아 농장은 복숭아나무 아래에 풀이 가득 자라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농장 한편에 마련된 작업장에는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으니 그 맛이 꿀맛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달 수가 있지? 자연재배로 정말 이런 맛이 난다고? 복숭아의 오묘한 맛에 푹 빠져서 백도며 황도, 이곳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극천, 그리고 망고 맛이 난다는 천황골드도 맛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백도가 가장 맛있었습니다. 너무 달지도 않고 단맛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하고도 깊은 맛이 났습니다.
저는 시골 텃밭 한쪽에 미니 과수원을 계획하면서 복숭아는 제외했었습니다. 나중에 묘목을 두세 그루 심기는 했으나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숭아는 벌레가 들끓고 익은 뒤에는 금방 물렁물렁해져서 썩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복숭아나무를 잘 키워봤자 실지로 먹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고 맛도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숭아꽃이 피는 이상향, 혹은 복숭아나무로 가득 찬 언덕 사이의 별천지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과일나무가 있는 조그만 과수원을 계획하면서 복숭아나무를 외면하다니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재배는 어떻게 하지? 자연에 그냥 맡겨놓으면 그것이 자연재배일까? 이곳 정도령 복숭아 농장의 주인장 정구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연재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선 정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15년 가까이 복숭아 농장을 경영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러한 자연재배 상태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유기농 재배를 했었으며 벌레 퇴치를 위해서 복숭아나무 사이사이에 크레졸과 막걸리를 섞은 페트병을 달아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1년에 3, 4차례 풀만 깎아주고 복숭아를 키운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0여 년이 걸렸으며 5년 전부터는 제초제, 비료, 농약 도 사용하지 않고 거름도 주지 않는다고 하니 신기합니다. 이곳 농장의 복숭아나무들은 쓸데없이 자라나는 도장지도 많지 않고, 나무 크기도 아담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복숭아 따기에도 적당한 높이와 크기입니다.
자연재배라도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복숭아 밭의 물 빠짐을 잘 관리하고 토양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숭아나무는 10년 주기로 교체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과일나무를 한번 심어 놓고 언제고 그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좋은 품종 혹은 새로운 나무로 교체해 나가는 것이 좋은 과수원을 만드는 요령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복숭아나무는 3년 정도 키워서 7년 간, 혹은 5년 정도 키워서 5년간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로 교체한답니다. 이렇게 해야 일정한 수확이 가능하고 항상 젊은 과수원이 될 수 있겠지요.
뉴질랜드의 어떤 부부가 먹거리 숲을 만들고 사과나무를 많이 심었었는데 30여 년 지나니 그 숲이 너무 우거져 사과며 다른 먹거리 생산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과일나무나 관리를 해주지 않고 그 정도 시간을 방치한다면 이미 과일나무로써 기능은 상실되겠지요. 과수원은 항상 젊게 관리하고 야생의 숲으로 진화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견학 기념으로 복숭아 1 상자를 2만 원에 샀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복숭아를 덤으로 받고, 남은 복숭아도 실컷 먹었으며, 순천의 토종과일나무 모임 회원 분들이 가져온 기정떡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복숭아를 새롭게 경험하고 여러 가지 좋은 지식을 많이 얻어들은 자연재배 복숭아 농장 견학이었습니다.
농장 견학이 끝나고 인근 식당에 모여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보기보다는 맛있었습니다. 국물이 진해서 특별한 풍미가 있었습니다. 돼지고기도 좋지만 민물고기나 매기 혹은 빠가사리가 들어 있었으면 더 맛있을 국물이었습니다. 그 뒤, 단체로 식당 옆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습니다. 위의 오른쪽 사진은 그 카페 내부의 모습입니다. 진열대 위에는 각종 선인장으로 만든 미니 농원이 꾸며져 있습니다. 오후 한나절 친구들과 여유롭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카페였습니다. 여기에서 일행들과 헤어졌습니다. 저는 기차를 타고 귀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이원면 여기저기를 둘러봅니다.
역시 이원면은 묘목의 고장 답습니다. 여기저기에 묘목이 자라고 있고 곳곳에 잘 가꾼 나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일나무를 조경수처럼 키우는 곳도 있고, 포도나무 묘목을 텃밭에 가득 심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매년 3월 말경에는 이곳의 묘목공원에서 옥천묘목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금년에는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100여 개 이상의 농가에서 묘목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는데 매년 1,000만 그루 이상의 묘목을 전국에 공급하고 있으며 그 양은 국내 묘목 거래의 70여%를 차지한다고 하니 대단한 분량입니다.('세계화 겨냥 옥천 묘목 축제 제대로 준비를', <중부매일>, 2023.3.13 )
이원면이 이렇게 묘목의 주산지가 된 것은 첫째, 묘목 키우기에 좋은 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토지의 70% 정도가 물 빠짐이 좋고 묘목이 뿌리내리기 좋은 사질 양토(모래에 진흙이 약간 섞인 흙)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분지형으로 사계절이 따뜻하며, 셋째 남쪽의 장수군에서 시작된 금강이 이곳을 거쳐 흐르면서 충분한 물 공급이 가능하여 우량 묘목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이곳은 전국적인 묘목 산지가 되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곳의 묘목 산업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토(佐藤)'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묘목을 생산했는데, 그는 복숭아 눈접을 하여 묘목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충북사범학교 교사였던 안헌귀가 농촌계몽 운동과 함께 묘목사업을 전문적으로 시작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배묘, 사과묘, 포도묘, 앵두묘, 잣묘 등으로 품종을 확대해 1942년에는 연간 50만 그루를 묘목을 생산하고 판매를 했습니다.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토'라는 일본인은 어떻게 이곳에서 묘목을 생산하게 되었을까?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을까? 충북연구원이 발간한 <이야기 옥천>(2021년)을 보면 이곳의 묘목생산 역사는 조선시대 전기 태종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이곳 군수 양구주(梁九疇)가 잣나무를 300여 그루를 서쪽 산에 심은 것이 그 시초입니다. 그리고 일제 시대로 내려와 사토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사토의 정확한 이름이나 직업,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자료가 없는 것이겠지요. 추측해 보면 아마도 이곳은 조선시대 때부터 나무, 특히 유실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 역사가 축적되어 있었고, 그것이 사토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 온 사토는 이 지방에서 맛본 복숭아에 특히 매력을 느꼈고 사업적인 가능성을 주목하여 그 묘목을 생산하게 되었다고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도령 농장에서 맛본 복숭아의 맛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백 년의 역사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이원면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산들을 다시 둘러봅니다.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이원면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서쪽 산들은 높고 동쪽 산들은 조금 낮습니다. 이원면의 서쪽을 높이 막고 있는 산들은 혹시 백두대간이 아닐까? 또 인터넷을 뒤져봅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타고 흘러 내려온 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매봉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태백산-소백산-속리산을 거친 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덕유산, 영취산, 지리산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원면은 속리산에서 덕유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합니다. 이원면에서 보면 동쪽에 백두대간이 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동쪽의 야트막한 산들 사이로 금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갑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원면은 북쪽, 서쪽, 남쪽의 삼면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 면은 평야지대로 열려 있습니다. 이원면의 한 복판을 흐르는 두 줄기 하천이 동쪽의 금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보면 이곳은 우리나라에 흔히 보이는, 화강암 대지가 만들어낸 침식분지인 구릉성 분지입니다. 이원면 바로 위에 있는 옥천군도 전형적인 분지의 모습인데 규모가 더 큽니다. 그 왼쪽에 있는 대전도 분지인데 옥천군 보다 3배는 더 큽니다. 대구도 그렇고 수원, 춘천, 충주, 남원도 그렇고, 경상남도의 수많은 마을, 도시들도 분지가 많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산들이 만들어낸 울타리가 '우리'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이원면을 둘러싼 산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행객처럼 이원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기차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이원역에서 대전 가는 기차는 오후 4시 53분과 7시 50분에 있습니다. 이원역으로 가서 농장에서 받아온 복숭아를 꺼내먹고 기차를 탑니다. 좌석에 앉자마자 견학 여행에 지쳤는지 깜빡 졸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제자리인데요?"
누가 깨웁니다.
"아차, 여기가 어디지요?"
"대전은 지났고요, 곧 신탄진인데요?"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 깜빡 지나쳤습니다. 서둘러 급히 짐을 챙겨서 열차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대합실로 나가 천안 가는 기차표를 사는데 안내원이 한마디 합니다.
"아니, 이원에서 타실 때 천안까지 표를 끊으시면 되는데요."
그러고 보니 이원역은 경부선 역 중 하나입니다. 이원으로 가는 열차가 매우 드물어서 무의식 중에 경부선 역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원 가는 하행열차는 대전에서 오전 9시 28분에 한차례, 그리고 저녁 시간대에 세 차례 있습니다. 상행열차는 하루에 여섯 차례 있습니다. 옥천역을 이용하면 더 많은 기차 편이 있습니다. 대전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더 편리합니다. 기차만 고집하다 보니 머리가 굳어졌습니다. 다음에는 버스를 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