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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주 Dec 05. 2023

막내가 고장 났어요.


아시겠죠, 여러분? 막내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다? 그렇지, 붙임성! 이번 O.J.T. 비행에서 만나는 선배들에게  신입들 싹싹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수 있도록 모두 파이팅 하세요!



신입 승무원 교육의 피날레인 실습비행 전날 담임교관이 유난히 강조한 것은 안전 매뉴얼도 서비스 프러시저도 아닌 불임성이었다. (물론 앞서 말한 것들은 언급할 필요 없이 중요한 사항들이어서 그랬겠지만.)

승무원에게 붙임성이란 있으면 좋을 옵션 같은 것이 아닌 필수 스펙이었다. 어떤 유형의 MBTI이건 간에 일단 승무원이라면 훔쳐서라도 장착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위장이라도 해서 갖추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애티튜드였던 것이다.

누구를 향한 붙임성일까? 손님이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바로 선배들을 향한 것이었다.


막내 승무원이 갖춰야 할 몇 가지 태도가 있다. 막내라면 모름지기 조금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안 되고 방긋방긋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대답해야 한다. 선배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일어서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제가 하겠습니다, 선배님!"을 외쳐야 한다. 설령 그 일이 막내는 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고 화장실에 볼 일을 보러 가는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나는 충성스러운 막내임을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기내 어느 곳에서든 마주칠 때마다 "수고하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를 빼놓지 않고 외쳐야 한다. 기본 중의 기본인 이것을 게을리하는 막내는 십중팔구 애티튜드 엉망이라는 평가와 함께 일 못하는 승무원으로 낙인찍힌다. (승무원에게 통용되는  '애티튜드= 일'이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다.)

 막내는 걸을 때도 맨 마지막이어야 한다. 내 앞에서 걷던 선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느라 멈춰 서기라도 한다면 그 선배의 기수 아래로는 올스톱이다. 선배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는 농담을 가장한 룰이 엄연히 있는데 선배를 앞질러 간다? 뒤통수에 구멍 뚫릴 각오는 해야 한다.

 회사버스를 탈 때도 막내의 자리는 맨 뒤 툭 튀어나온 좌석. 기수대로 앞에서부터 착착 앉게 되는데 그날따라 어느 정도 높은 기수가 중간쯤 앉아버리는 날에는 앞자리는 텅 비고 뒤쪽만 바글바글해지는 기우뚱하고 불균형한 풍경을 보게 된다. 버스에서 내릴 때도 당연히 앞자리 기수부터 내리기 시작하는데 나머지 기수들은 자리에 앉아 한 명 한 명 내릴 때마다 "수고하십시오"를 복창한다. 항공사에 입사한 것이 아니라 여군에 입대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중에서도 내가 유난히 걱정하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일명 '매니저 케어, 선배케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침묵으로 어색해지는 순간을 만들지 않고 기분 좋은 말, 듣기 좋은 말로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일. INFP인 나에게는 어려운 숙제였다. 낯설고 새로운 상황에선 더욱 쭈그러드는 나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라 라인에 올라가면 글로 배운 것과 실제 비행과의 연결이 더뎌 어리바리할 것인데 집중케어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케어를 해야 하다니. 머리가 하얘졌다. 그 케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럴 거면 케어도 매뉴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걱정 잔뜩 품고 오른 비행기. 나리타 퀵턴(도착지에서 내리지 않고 바로 돌아오는 비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종은 보잉 767.

그날따라 만석에 정신없이 바빴다.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열심히 배우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 했지만 현실은 이 한 몸 어디로 치워야 할지 좀처럼 몸 둘 바를 모르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랜딩 사인이 울렸다. 넋이 나간채 기수차이가 20기는 나는 선배님 옆 점프싯에 앉았다. 그때 불현듯 교관님의 말이 에코까지 머금고  머리를 스쳤다.

"막내가 끝까지 사수해야 하는 것은 붙임성, 뚱하게 있지 말아요 요요..."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굴리며 선배님을 흘깃 보았다. 아뿔싸. 선배님은 조용히 랜딩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계셨다. 말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한마디도 없이 앉아있으면 나는 찍힌다. 말을 하자. 말을.......  '붙임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머리가 마비된 것인가. 순간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선배님, 주무십니까?


내 말을 들은 선배님은 눈을 번쩍 뜨셨다. 그리고는 그대로 얼어버린 나를 오뉴월에 눈사람 보듯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셨다. 비행기는 이착륙 때 가장 사고가 많다. STERILE COCKPIT 규정이 적용되는 때다. 이착륙 때만큼은 조종실을 방해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규정인데 그 말인 즉 그때는 승무원도 점프싯에 착석한 채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EACUATION MANUAL(비상탈출 매뉴얼)을 마음속으로 계속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때란 것이다. 그런데. 막내가. 잠시 눈 감은 선배님에게. 지금 자냐고. 물은 꼴이 된 것이다.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하는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고장이 났다. 출력오류에 이어 먹통이 되었다고나 할까. 다행히도 잔뜩 긴장한 막내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선배님이 웃음을 터트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영락없는 코미디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비극적인 내 비행생활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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