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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B Jan 20. 2024

2023년 8월 22일



 작년 여름엔 비가 정말 많이 왔다. 조금 뿌려지다 그치고, 가늘게 내리거나 굵게 내리고, 천둥번개도 치고, 며칠을 내리 오고. 방식도 정도도 매번 다양했던, 이제는 ‘우기’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계절이었다.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딜 다녀오던 건지도 깜깜하다. 다만 흐린 하늘에 볕이 더해져 공기가 누런 필터를 같은 날이었다.

 집 근처 마트 입구에는 으레 건물 곁에서 볼 수 있는 처마가 달렸다. 마트에 들어설 땐 비가 오지 않았었는데, 고작 십 분 사이에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왜, 있잖은가. 우산을 써도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 드는 그런 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올려다보다 우산을 펴려는 순간, 옆에서 혼잣말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비가 오네.”

 고개를 돌리니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무척 뜬금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분을 알던가?’

 알지도 못하는데 왜 말을 붙이지? 같은 재수없는 젊은이다운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어도 너무 익은 분이었다. (모 배우님을 엄청나게 닮아서였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고우셨다. 진짜로. 과거에도 여리셨을 것 같은 체구에, 머리는 단정하고, 눈은 반짝반짝했다. 젊은 시절이 어떠셨을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3초.

 나는 내가 썩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가끔 스스로 들어도 놀라우리만치 친근하게 말을 붙일 때가 있다. 이 순간에도 그랬다. “우산 씌워드릴까요? 댁이 어디세요?” 조금은 어색한 미소였을 것이다. 반은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나머지 반은 사회적인 상냥함을 가장한 때였으니까. 할머님은 자신이 몇 동에 사는지를 알려주셨다. 우리가 등진 건 아파트 단지 사이에 낀 마트였다.

 집에서 2분도 채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모셔다드리겠다는 말이 쉽게 튀어나왔다. 고맙다는 말을 연신 들으며 한 손에는 할머님과 내 짐을 몰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우산을 든 팔에는 할머님의 손도 달았다. 주렁주렁. 게다가 나는 긴 여름용 플레어 치마를 입고 있었던지라 젖은 밑단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즉 꽤 많은 요소가 편안한 걸음걸이를 방해했다는 뜻이다.

 걸음은 느렸다. 우산 위로 후두두둑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할머님은 걷는 내내 줄곧 말을 붙이셨다. 나이 든 분들이 으레 그렇듯 사실 내용은 신상털이였다. 하지만 혼자 지내실 게 뻔한 할머님께 내 신상 좀 털려봐야 뭐 어떻겠느냐는 생각에 하나하나 답해드렸다. 그동안 비는 점점 거세졌다. 과장 조금 보태서 누군가 거대한 바가지로 이 우산을 향해 물을 쏟아붓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길지도 않은 여정의 중간에 작은 주륜장에서 우산을 접고 쉬어가기로 했다. 할머님은 이렇게 비가 거세질 때는 굳이 걷지 않고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대로 몇 분 되지 않아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졌다. 우리는 다시 우산 밑에서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거의 도착할 즈음 할머님께서는 자신이 몇 호에 사는지를 알려주셨다. 한 번 들르라고, 사례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럴게요, 해야지 별 수 있나. 비로소 우산을 접을 때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몇 호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느냐 확인 사살까지 하셨다. 1311호 맞죠? 답을 드리자 그래그래, 하며 웃으시는데 웃으시니까 더 고와서 속으로 얼빠진 인간처럼 감탄했다.

 조금 젖으셨는데 들어가서 춥지 않게 계세요. 그리고 너무 고우세요. 사심 섞인 인삿말을 드린 뒤 내가 가야 할 길로 향했다. 몸을 흘긋 내려다보니 어깨며 팔은 물론이고 등과 가슴팍까지 흠뻑 젖어있었다. 짙은 회색 옷이 반이나 검어졌다. 할머님 젖지 마시라고 힘낸 결과물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지금도 할머님이 사시는 동호수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리고 정말 하루쯤 들러볼까 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게 8월 말의 일이었으니 지금쯤이면 잊어버리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내 용기는 딱 거기까지인지도 모르겠다. 친절한 행동 하나, 말 몇 마디, 미소 몇 번.

 그래도 가고 싶을 때마다 어떤 걸 선물로 가져다드리면 좋아하실까 가볍게 고민해보는 순간이 재밌다. 이번 겨울에는 정말로 하나를 정해서 찾아뵈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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