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이던 1호가 틱이라는 타이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퇴행이 온다고 했는데 말할 줄 아는 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속상함, 창피함이 무엇이더냐? 너만 괜찮아진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퇴행의 순간들을 묵묵히 다 받아주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자 엄마를 부르는 횟수가 아주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1호가 상담을 받은 지 약 3-4개월이 지났고 상담선생님을 만났다. “어머니 보통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1호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네요. 모래놀이는 처음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무엇이 문제일까?’ 차분히 생각해 본다. 문제해결을 위해 사용되던 나의 버릇은 좀처럼 통하지가 않는다. 통하지 않는 이 무언가를 꼭 찾아내야 했다.
며칠 후 부모상담이 시작되었고 상담선생님의 변함없는 나긋한 목소리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머니”에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한 부모상담인데 무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막 내던지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마흔이 되도록 혼자 옷을 못 골라요. 옷 매장을 가면 머리가 어지럽고 저에게 어울리는 옷이 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엄마가 주는 옷을 입어요”
“친구들과의 기억이 없어요. 나에게 필요한 건 모르겠는데 식구들에게 필요한 건 잘 알아요”
“결혼도 제 의지가 아니에요. 아빠가 말기암이라 돌아가시기 전에 하라고 해서 그냥 했어요”
“너무너무 숨이 막혀요”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기억 속의 나의 모습은 한 번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늘 마음속에 자유만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 같았다. 24시간 3교대로 일하시는 아빠는 늘 예민해 계셨고 식구들은 그런 아빠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엄한 성격이라 할머니, 아빠형제들도 무서워 우리 집에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엄마는 집에 큰소리 나는 것을 원치 않아 늘 아빠를 신경 썼고 먹고살기 위해 낮에 일을 하셨다. 적막한 집인데 돈 관련된 일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났고 시끄러웠다. 그렇다고 아빠 엄마가 역할을 못한 건 아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가난에 대한 부담감, 피로감이 너무 커서 늘 짓눌려 계셨고 먹고, 자고, 싸고 기본적인 생활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런 가족에게 나는 순종적으로 말썽 안 부리고 잘 커준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