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_남겨진 두 사람
1995년,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다시 여미라고 재촉하던 이른 봄의 화창한 어느 날.
해가 서쪽으로 막 기울기 시작한 오후, 수업을 마치고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파란 신호를 기다리며 차량용 신호를 살핀다. 집은 국민학교 5학년의 걸음으로도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세월의 흔적을 상징하듯 ‘전통’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진 시장길을 지나야 했다. 전통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횡단보도, 들릴 듯 말 듯 한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신호등에 집중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내 앞에서 요란하게 울리고는 금세 멀어져 간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서둘러 달리면 누군가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반증하지만, 보통의 아이들이 그렇듯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정은 뒤로 한 채 바로 앞을 지나가는 구급차에 그저 신기하고 반가운 감정만 돋아난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기함과 반가움은 뒤로하고, 멀리 뛰기 하듯 횡단보도를 건너 과일, 생선, 신발, 통닭, 정육 가게들을 지나 중앙길 좌우로 나무의 굵은 가지처럼 뻗어있는 큰 골목으로 방향을 틀고, 다시 한번 촘촘히 나눠져 있는 작은 골목에 들어섰다. 큰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온몸에 흐른다. 무거운 공기의 흐름이 어느 한 곳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주변이 시끌벅적하고, 조금 전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익숙한 흰색 승합차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소리 없이 울리며 서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러워졌고, 집이 위치한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한 풍경은 남달랐다. 골목으로 나온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호흡이 골목 안쪽 어느 한 집의 대문을 향해 있었고, 사람들 사이로 구급대원이 서두르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쨌든 집으로 가야 했던 나는 발걸음을 옮겼고,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았던 2층 주택의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시선이 머무는 곳이 내 발걸음이 향한 곳과 같은 방향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느낌은 불안함으로 바뀌어 갔고, 대문을 넘어 2층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두 명의 구급대원이 들것에 실린 한 남자와 함께 내려왔다. 불안함은 다시 무서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들것에 실려있던 남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계시다가 뇌졸중, 당시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표현 ‘중풍’으로 쓰러지셨던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몸 쓰는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일거리가 없는 날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없이 쉬는 날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예상치 못한 소란스러움은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을 남기고 구급차에 실려 집을 떠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볼 새도 없이 집에 홀로 남겨진 12살의 아이는 아무것도 못한 채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며 누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후로 아버지는 여러 곳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혼자 있을 때 쓰러지셨던 터라 골든 타임을 놓쳐 전신 우측 마비와 막힌 뇌혈관을 유지한 채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얻었다. 어느 정도의 통증인지 가늠은 안되지만 평생 두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때 아버지의 나이 마흔두 살이었다. 맞벌이에 빠듯한 생활을 유지하던 집안 형편, 그리고 아직은 아버지를 챙겨 주기엔 어렸던 누나와 나, 이러한 아쉬운 상황들은 결국 아버지를 나고 자랐던 시골로 데려갔다.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병원을 전전하고, 요양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기까지 그리고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을 구석구석 끄집어내고 보니 큰 뭉텅이로만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일들이 아주 작은 조각조각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날카롭게 조각난 당시의 기억들도 언젠가는 뭉툭하게 깎아 마음 밖으로 굴려 보낼 수 있길..]
지나갔던 구급차를 집에서 재회한 지 1년 6개월 후 삶의 흐름은 방학 때나 5~6시간씩 걸려 누나와 함께 놀러 갔던 아버지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방학 때와 달라진 건 나 혼자 내려왔다는 것과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 동갑내기 친구는 나를 포함해 3명, 그리고 전학으로 다니게 된 중학교에는 1학년이 달랑 한 반, 그마저도 24명이라는 것은 전교생 4,800명의 국민학교, 2,000명 정도의 중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낯선 환경이었다. 게다가 그 지역만의 학교 문화,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와 같은 낯선 새로움은 금세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그 모습을 바꿔 지칠 대로 지쳐있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틈만 나면 공격해 오는 불안한 심리를 방어하기 위해선 행복했던 지난 추억과 즐거울 미래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소환해야 했다. 그러나 몰려오는 적을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마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백기를 들곤 했다. 점점 우울감에 빠져들던 어느 순간,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중재를 위해 불현듯 나타났다. 중재자의 논리는 간단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에게 불안과 걱정은 무의미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함을 밀어내는 것에 나름의 효과가 있는 듯 보였고, ‘죽음’이라는 개념이 가져온 중재는 성공적인 듯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곧바로 새로운 문제를 상기시켰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살아있는 것은 또한 무슨 의미란 말인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질 텐데, 지금 살기 위해 먹고, 자고, 학교에 가는 것이 왜 필요한 걸까?”
14살의 나이엔 어울리지 않는 삶에 대한 회의는 스스로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어떻게든 주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강요했다. 결국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휴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불안이 높은 심리 상태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그림만을 펼쳐 보였고, 점점 그 그림 속으로 끌어당겼다.
불편한 몸과 죄책감을 품은 아버지, 그리고 상처 난 마음과 삶의 회의를 품은 나.
둘은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듯한 한적한 어느 시골 마을에 남겨졌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