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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게 Dec 16. 2023

"난 엄마처럼 안 살 거야" 그 뻔한 클리셰

엄마 미안한데 엄마를 보면 엄마가 되기 싫어요.


숨만 쉬어도 피곤한 월요일 낮- 대뜸 엄마한테서 톡이 왔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모신 절에 가서 나를 위한 기도를 했다는데...

내 만사형통은 밑밥이고, 1시간 중 약 59분 동안은 '내 딸이 더 늙기 전에 얼른 정신 차리고 아이 좀 갖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을게 분명하다.

뜬금없는 기도라이팅(?)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정작 거기까지 가서 본인을 위한 기도는 뒷전이고 내 기도만 열심히 했을 엄마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하고 살살 아려온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는 아픈 곳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허리도 아프고, 간이랑 갑상선도 안 좋고, 신장도 나쁘다고 한다.

젊을 때부터 이상 신호를 보내던 몸이 늙어선 오죽할까. 올해 환갑을 맞은 엄마는 이젠 남들 먹는 양의 반에 반에 반도 먹질 못한다. 아니- 먹어선 안된다. 간과 신장의 기능이 많이 떨어져서 고기 안돼, 생선도 안돼, 소금과 설탕은 당연히 안돼, 채소나 과일, 견과류, 곡류조차 아주 조금씩만 먹어야 한단다. '도대체 뭘 먹고살아야 하냐'는 엄마의 절망에 담당의사는 '물만 드세요'라고 답했단다. (선생님.. T야?)  


그런 엄마에 비해 건강 체질로만 보이던 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인지- 2년 전,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심장 스탠트 시술이란 걸 받았다. 당시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새삼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나 늙었구나 하는 생각에 곤히 잠든 남편이 깰 정도로 침대에 누워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자기들의 건강보다 나의 임신과 출산이 더 간절한 걸까? 진심? 도대체 왜?



사실 ‘도대체 왜?’는 부모-자식 간에 무효한 물음표긴 하다.

나에게 부모란 (적어도 내가 보고 자란 내 부모는) 아낌없이 주는 수준이 아니라, 끝을 모르고 한 없이 퍼주는- 이해할 수 없도록 무한한 미지의 존재이다.

자식을 위해 제 몸과 마음을 다하는 헌신과 기꺼이 자신의 모든 걸 갉아 먹히는 희생-  여기에 왜? 라는 말은 감히 들이밀지 못한다. 왜긴 왜야. 부모니까, 혹은 자식이니까.


30여 년 전 서울. 좁고 가파른 골목에 자리한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꾸렸던 나의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방 하나 딸린 빌라, 빌라에서 방 두 개짜리 아파트, 다음은 방 세 개짜리 아파트, 그리고 마침내 방 네 개짜리 아파트로 한눈팔지 않고 차곡차곡 삶의 터전을 다져왔다.

아쉽게도 이 성공적인 여정에 남다른 능력이나 놀라운 행운은 없었다. 오직 지난한 노력만 있었을 뿐.

남들보다 더 일찍부터 더 늦게 까지 일을 한다거나, 남들이 사는 거(혹은 입는 거, 먹는 거 등) 참으며 돈을 모으는 식의 노오오오력 말이다.

그리고 그 치열한 노력에는 관성이라도 있는지, 아빠는 칠순이 가까워지고 엄마는 환갑을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오래 일하고, 아직도 돈을 쓰는 것보단 모으는 걸 더 잘한다.


그렇게 젊은 날은 남들 다 하는 것도 못해본 채 보내고, 이제는 남들 다 하는 것도 할 줄 모른 채 늙어버린 두 사람은- 놀랍게도  자식만큼은 부족함 없이 키웠고,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은 남들 하는 건 웬만큼 다 해보며 자랐다.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을 열심히 살 수 있도록 도운 원동력이 된 건지,

아니면 열심히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인질 같은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 부모님의 30여 년이란 긴 세월이 나와 내 동생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치고, 키워내느라 하얗게 소진됐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하는 사실 하나 더- 우리 부모님의 '부모 노릇'이 아직도 현재진행형 이라는 거다. 

아들 딸 모두가 서른을 훌쩍 넘기고, 심지어 결혼까지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 지금에 까지- 여전히 자식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그중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는지만 생각하는 것 같다.  

혹시 우리 엄마에게 엄마의 역할, 우리 아빠에게 아빠의 역할은 첫째인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 형태만 바뀔 뿐 끝이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아는 부모란 이렇게 미련하도록 위대한(혹은 위대하도록 미련한) 존재인데,

감히 나처럼 작은 그릇의 인간이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아이를 낳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 진짜 무서운 질문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이다.


내 인생에서 만큼은 나를 최우선으로 두고 싶은 작고 이기적인 나는,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기는 게 무섭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자식 일이라면 뼈를 내어주고, 살도 내어주는-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잘 키운 자식들이 전부인- 그리고 그게 최고의 보람이자 기쁨인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많은 걸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하는 우리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부모의 위대함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사람인 걸까?

자식을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던데, 자식이 없는 나는 아직 덜 커서 그 위대함이 미련함과 구분되지 않는 걸까?


벌써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살을 먹어버리고, 내 몸은 엄마가 될 수 있는 마감시간이 더 임박 해졌을 텐데도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물음표만 늘어뜨리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참 답답하고 답 없는 인간이다.


한편으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되길 바라는 인물' 부동의 랭킹 1위일 우리 엄마가 너무나도 간절히 내가 부모의 삶을 살길 바라는 걸 보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일임에도 분명히 알겠다. 내 주변 엄마가 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아이를 낳기 전엔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기쁨과 행복'이 있는 거겠지.


그걸 모르겠는 건 아니야 엄마!

근데 어떡해~ 엄마가 날 너무 잘 키워준 덕분에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을 모르는 지금도, 난 매일 충분히 행복해. 지금의 행복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계속되길 집중하고 싶어. 그니까 내 임신 걱정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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