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관계는 보통 아주 친밀하거나 아니면 견원지간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때로 제 3의 관계도 존재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서로 띄엄띄엄 보는 남인 듯 남 아닌 남 같은 요상한 모녀관계도 존재한다. 내 어머니와 내가 딱 그러하다.
우리는 말이 없다. 사실 내 어머니의 사랑에는 말이 필요없다. 사랑하는 5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인정하는 말, 함께 하는 시간, 선물, 헌신 그리고 스킨쉽이다. 굳이 꼽아보자면 어머니의 사랑은 헌신이다. 내 어머니는 프로주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 어머니는 살림을 완벽하게 하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아버지가 주시는 작은 돈으로 최대한 절약하고, 때마다 밥하고 매일 청소하고 깔끔하게 빨래 하는 것이 내 어머니의 사랑인 것이다.
나는 말을 한다. 좋은 건 좋다고, 예쁜 건 예쁘다고, 잘하는 건 잘한다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말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인정하는 말을 듣고 싶은데 집안일을 다 마친 엄마는 자신이 할 사랑을 다하여, 내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관심을 기울일 에너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엄마의 머릿속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프로주부라 아마추어인 내 의견 따위는 필요 없다. 내 방의 인테리어도 본인 맘이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본인 맘이고, 옷을 세탁소에 맡길지 세탁기에 빨지도 본인의 맘이다. 그래서 퇴근하고 돌아와보면 갑자기 방이 바뀌어 있거나, 드라이크리닝해야할 옷을 그냥 빨아 버리셔서 당황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냥 살았다. 다시 되돌이키려면 엄마와 입씨름을 하고 내 손으로 귀찮은 무언가를 해야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참을 인 하나면 신간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던 내가 참지 못하고 폭발한 일이 생겼다.
엄마가 이상한 음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곰탕에 설렁탕을 섞고, 된장찌개에 청국장을 섞고, 국에 계란을 넣어 수란을 만드시더니... 급기야는 찌개에도 계란을 넣어 익히셨다. 날이 갈수록 종류를 가리지 않으셨다. 나는 향채소를 안먹고, 낯선 향신료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며 무엇보다 섞인 맛을 싫어한다. 그런 나에게 가혹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시작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점점 독해졌다. “절대 안먹는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거칠게 항의하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의 음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색을 라도 엄마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냐고? 그렇게 싫다는 데도 안 달라지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맛있을 것 같단 말이야.”
풀 죽어서 엄마가 한 말이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곧이어 선선히 말했다.
“알았어요.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학교가 싫다, 선생님이 싫다, 공부가 싫다 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기나 했었을까? 그때 동생이 학교에서있었던 행복한 이야기 보따리를 가지고 엄마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엄마는 복사꽃 피듯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외면하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밀려났고, 세상에게서도 한발자국 물러섰다.
오랫동안 그 순간을 원망해 왔다.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렸던 것은 아니다. 다른 선택이 있었음에도 내 안으로의 침잠으로 빠져든 데 대한 아쉬움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내가 엄마를 그리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계기는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상담을 받으면서부터이다. 엄마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좋아야 하고, 잘해야 하고, 남에게 책잡혀서는 안 되고, 늘 행복해야 했다.
엄마가 가장 견디지 못했던 것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일 싫다 소리만 늘어놓는 아이가 바로 당신 자식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는 에너지뱀파이어였다. 그만큼 시달렸으면 엄마도 한 번쯤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엄마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있으며, 피곤할 수 있고, 짜증 날 수 있으며, 화날 수 있다. 그리고 기분이 죽 끓듯 변덕스러울 때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 기분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않을 수도 있고, 엄마도 해도 해도 잘 안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리액션을 해주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잘 안될 수도 있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늘 내 일이었다. 기준이 정확하게 서지 않고 주장이 분명하지 않아서 늘 치이고 뒷전이었던 내 감정과 욕구를 찾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었다. 엄마도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고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 엄마에게 내가 원하는 사랑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엄마에 대한 바라기를 멈추려 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려고 한다. 띄엄띄엄 보며 강 건너 이웃 같은 사이일지라도 우리는 분명 모녀지간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사시라.
... 그리고 내가 알게 되는 것... 엄마를 놓아드리며, 나도 한없는 자유를 얻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