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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Apr 01. 2024

표정관리라는 덕목


 “인생은 발레와 같다.”     

 

 좋아하는 강사님 중에 한 분이신 김창옥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발레는 힘든 점프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인생과 흡사하다고 하셨다. 성공적인 점프, 실패한 점프. 그저그런 보통의 점프. 그 어떤 점프도 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힘들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발레도 . 인생도.  

   

 나는 나의 단점을 말하거나, 현재의 고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힘들고 부족하고, 모자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건데... 당연할 것 까지는 없지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냥 나는 그렇다고. 손등을 손등이라 말하고 손바닥을 손바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고, 또 누구에게나 말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직함과는 좀 다른 뉘앙스가 있었다. 상담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거짓을 짊어질 배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배포 외에도 꼽으라면 상상력의 빈곤을 들 수 있겠다. 나는 그 외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임기응변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진실됨은 미성숙한 자아의 한 속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내게 친구가 “너를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고 원망 겸 나무랐을 때 ‘아, 입이 있다고 다 떠들어대서는 안된는 것이구나!’ 크게 뉘우친 적이 있다.      


 한때 나는 내가 방광암인 줄 알았다. 하필 정형외과에서 몸에 큰 돌덩이가 있고, 그게 방광인 것 같다고 했을 때, 마침 소변에 문제가 있었다. 암인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재미없고 버거운 삶을 고통스러운 치료까지 해가며 연장할 필요는 내겐 없었다.      


 알고보니 자궁근종이었고, 가벼운 방광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사이 나는 친구에게 내 죽음에 대해 떠벌렸고, 걱정하는 그녀에게 삶에 뜻이 없음을 엄숙히 읊조려 놓고 있었다. 나의 담담함에 그녀는 더는 말을 보태지 못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단 한 가지... 내가 암이 아니라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죽음이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삶도 나에게 새삼 무언가를 선사하지는 않았다.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 나는 그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가는 나와 나에게 다가올 고통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염려를 했던 것이다.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던 내가 부딪힌 소중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 마음을 간직하고만 있지 않았다. 나에게 표현햐고 진심을 전한 것이다. 내 어머니도 해주지 않은 사랑을 나는 그녀에게 받았다. 내가 받고 싶었던 꼭 그런 사랑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또한 내가 경솔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어리고, 무책임하고, 철없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나도 크게 변명할 다른 말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리고 나에 대한 그녀의 결론을 나도 수긍하고 인정했다.      


 그 이후 나는 내 앞에 선 사람이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이 그 사람의 마음에 꽂히고,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 내가 내뱉는 말은 언제나 독백이나 방백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분명 들어달라고 하고있는 것은 맞는데, 언제나 내 생각만을 했다. 지금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귀 기울이는 누군가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니 머릿속을 오가는 잡념을 어떤 필터링 없이 친구에게 떠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시한부인데... 그냥 콱 죽어버릴래.“ 이딴 헛소리를 말이다.     


 웃프기만한 이 해프닝은 나에 대한 뼈아픈 평가만을 남기고 떠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서 특별히 용기를 쥐어짜지 않아도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도전에 피하지 말고 경험해 보겠다는 의지가 일어났다.       

 주야로 일하고, 글공부를 하고 운전을 해보기 위해서 애쓰고.... 어떤 것은 실패하고, 어떤 것은 성공하고, 어떤 것은 진행중인, 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소소한 통찰은 나에게 10여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라’는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읽어볼 생각도 없지만 그 제목 만큼은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다.      


 요즘 나에게는 또 다른 삶의 위기가 찾아왔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곧 해고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닥쳐온 위기이다. 다른 동료들과는 다르게 나는 나이가 많아 이번에 해고 되면 다시 같은 직종에 취업하기는 어렵다.      


 해고 통보를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은 맞다. 그렇지만 예전과 다르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불안을 떠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더 자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방향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미래는 그렇게 불투명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바라보면 가능한 범위가 어디인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래가 창대하지 않다고 해서 비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작은 어쨌든 분명한 자기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해고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은 내 힘으로는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해고된다는 것보다 나를 더 의기소침하게 만든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가고 싶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있도록 살고 싶다. 라고 말이다.      


 엄마와 동생이 약점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나는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책잡힐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에는 내 인생의 짐을 타인의 어깨에 슬쩍 올려놓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이 자기 몫을 다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할플레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감정이, 기분이, 사정이 옆을 삐져나가고 질질 흘리지 않도록 잘 다독이고, 풀고, 감당해 나가는 것도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 사람이 진 짐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던 그래서 내가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았던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에너지뱀파이어 신세를 좀 벗어나지 않았을까? 그동안 나를 참아준 친구에게 더 이상 나를 인내하고 견뎌달라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애 안도한다.      


 불교에는 제행무상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그렇게 끊임없이 달라지고 변화해 왔다. 나도 궁금하다. 10년 후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살까?      


 이제 곧 작별하게 될 회사의 화장실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 변화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2015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만 9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물론 미끄러지기도 하고 궤도에서 이탈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꽤나 용케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제 내 투명한 미래를 좀 불투명하게 만들려 한다. 무엇을 원하는 지, 그래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내 목적과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행동하려 한다.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걸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 흔들리지 않고, 휘청이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잔에 물은 반 밖에도 아니고, 반 이나도 아니고, 그냥 반이 남아 있는 거라고 한다. 무엇이 희망적이거나 아니면 비관스럽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들뜰 필요도 걱정스러워 잠을 못이룰 필요가 없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표정관리란 애써서 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노력해서,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거짓으로 말이다. 그러나 표정은 관리 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 되는 것이었다. 내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오늘은,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한 내 모습이 보인다. 내일도 모레도 나의 거울이 흔들림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얼 해야 하는 건지 잊지 않고 살려 한다. 지치지 말고 앞으로 나가보자.      


 ”지금까지 잘 왔으니, 앞으로도 잘 할 거야. 

 너는 원하는 그곳에 분명히 도달할 거야. 

 너는 꼭 행복해질 거야.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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