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소멸 도시의 반격, 일본 소도시에서 배우는 것
어린이 울음소리가 끊긴 골목, 저녁 일찍 불이 꺼지는 집들, 셔터를 내린 채 몇 년째 방치된 상점가.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지방 도시들이 마주한 서늘한 풍경입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 228개 시·군·구 중 무려 89곳이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전남, 경북, 강원, 전북 등 사실상 국토의 절반 이상이 구조적인 소멸 위기에 놓인 셈입니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매년 1조 원이라는 막대한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마을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비어 가고 있습니다.
돈을 쏟아붓는 것만으로 사람의 발길을 돌릴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다시 모이게 할까요?
우리보다 먼저 같은 질문 앞에 섰던 일본의 산골 마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답을 찾아냈습니다. 인구 5,000명 남짓한 작은 마을에 어느 날부터 웹디자이너, IT 엔지니어, 제빵사, 수제 구두 장인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대한 정착 보조금이나 거창한 신도시 개발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그저 예술가들을 마을로 초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소멸에 대항하는 소도시의 전략 미리보기
전국 20위 소멸 위험 마을이 크리에이터 성지가 된 이유
마을이 사람을 고르기 시작하다
논밭을 캔버스로, 폐교를 미술관으로
보조금이 아니라 이야기를 설계할 수 있는가
도쿠시마현 카미야마는 오사카에서 버스로 4시간이나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깊은 산속 마을입니다. 면적의 83%가 산지인 데다 사방이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죠. 1955년 2만 1,000명에 달하던 인구는 꾸준히 줄어 이제 4,800여 명만 남았습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노인인 이 마을은 한때 일본 전국에서 20번째로 소멸 가능성이 높은 사라지기 직전의 동네였습니다.
이 첩첩산중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거나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1991년, 마을 출신의 한 청년이 먼지 쌓인 낡은 인형 하나를 발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2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마을이 우호의 증표로 보냈던 파란 눈의 인형이 카미야마 초등학교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청년 오오미나미 신야는 이 인형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작은 교류 행사를 기획했고 이것이 훗날 30년에 걸친 마을 재생 프로젝트의 첫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가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예술가'였습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국내외 예술가들을 마을로 초대해 두 달간 주민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게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마을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이 담긴 작품을 남겼고 주민들과 소통하며 일상을 나눴습니다.
예술가들이 굳게 닫혀 있던 마을의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낯선 이방인에 익숙해진 마을, 외지인을 기꺼이 환대하는 문화, 그리고 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라는 소문. 이 세 가지 무형의 자산이 쌓이자 마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회는 기술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2005년 일본 정부의 인프라 사업으로 이 산골짜기에 고속 광역망이 깔린 것입니다. 도심 못지않은 쾌적한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자 숨 막히는 도쿄의 IT 기업들이 카미야마의 텅 빈 창고와 폐교를 위성 오피스로 개조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최첨단을 달리는 웹 엔지니어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시원한 아쿠이강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노트북으로 코딩을 하고 디자인을 합니다.
일은 대도시와 똑같이, 하지만 삶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게
카미야마가 제안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카미야마의 재생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파격적인 개념은 '역지명(逆指名)'입니다.
흔히 지자체들은 "누구든 좋으니 제발 와달라"며 보조금과 일자리를 미끼로 사람을 구걸합니다. 하지만 카미야마는 달랐습니다. 주민들이 회의를 통해 마을에 필요한 직업을 정하고 그에 맞는 사람을 먼저 지목해 초대했습니다. 제빵사가 없으니 제빵사를 디자이너가 필요하니 디자이너를 부르는 식입니다. 민간 조직인 '그린밸리'의 주도하에 매년 15~40명이 이 초대장을 받고 산골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구 유치가 아닌 마을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겠다는 굳건한 철학이었습니다. 이들은 텃세를 부리는 대신 외지인의 낯선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흡수했습니다. 이 수평적인 공기야말로 이주자와 기업을 불러 모은 진짜 동력이었고 이렇게 섞인 다양성은 다시 새로운 사람을 부르는 선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실제 2008년부터 8년간 적어도 91세대 161명 이상이 카미야마에 짐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과는 숫자가 아니라 '얼굴'에 있습니다. 웹디자이너, IT 엔지니어, 예술가, 수제 구두 장인. 마을이 필요로 했던 맞춤형 인재들이 마을이 원하는 타이밍에 도착한 것입니다.
카미야마는 이를 '창조적 과소(創造的過疎)'라고 명명했습니다. 인구 감소라는 파도를 거스를 수 없다면 차라리 인구의 질을 높이겠다는 역발상입니다. 머릿수만 채우는 정주인구가 아니라 마을과 엮이는 관계의 밀도를 촘촘하게 짜는 것. 그것이 소멸 직전의 마을이 찾아낸 완벽한 생존 공식이었습니다.
니가타현 에치고츠마리는 카미야마보다 훨씬 큰 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도쿄 23구 면적의 1.2배인 760㎢에 인구는 6만 3,000명. 고령화와 젊은이들의 유출로 아름답기로 유명하던 계단식 논은 황폐 해졌고 빈집과 폐교가 속출했습니다. 보조금으로 젊은이를 유인하거나 기업을 유치하는 방식은 이미 수십 년째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니가타현이 내린 결론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콘크리트를 붓지 않겠다. 대신 예술가를 부르겠다.
6년간의 준비 끝에 2000년 첫 '대지의 예술제'가 열렸습니다. 40개국 예술가들이 마을의 논과 밭, 방치된 빈집과 폐교에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제가 끝난 후에도 작품을 철거하지 않았습니다. 폐교 운동장이 조각 공원이 되고, 버려진 농가가 설치 미술 공간이 되었습니다. 760㎢의 땅 전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것입니다.
결과는 확실했습니다. 2000년 첫 회에 16만여 명이 찾았지만 2015년에는 50만 명을 넘었습니다. 약 50억 엔의 경제 효과도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숫자 뒤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예술제에 반대했던 주민들이 직접 작품을 관리하고 방문객을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온 예술가들이 마을 할머니와 함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땅과 삶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에치고츠마리가 만든 것은 관광지가 아닙니다. 예술제는 10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된 지역 정체성 재건의 결과물입니다. 건물을 짓고 땅을 뒤엎는 콘크리트 중심 개발이 아니라 논, 폐교, 빈집, 계단식 밭 같은 이미 거기 있는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살린 것입니다.
카미야마가 사람을 정착시키는 전략이라면, 에치고츠마리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오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전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주 오는 사람이 결국 머물게 되고 머문 사람이 마을의 이야기를 밖으로 전합니다.
행정안전부는 매년 1조 원씩 10년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미야마와 에치고츠마리가 보여주는 것은 돈이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카미야마는 보조금 없이 크리에이터를 불렀습니다. 에치고츠마리는 새 건물 없이 50만 명을 불렀습니다. 두 곳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그 공간에 올 이유를 마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일본에서는 이미 주민등록은 없지만 자주 찾아오고 경제적·정서적으로 연결된 인구, '관계인구(関係人口)'라는 개념이 정착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생활인구'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개념을 도입했지만 정책은 여전히 정주인구 유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카미야마와 에치고츠마리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의 마을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러 누군가가 올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을 스스로 쓰고 있습니까.
소멸은 사람이 줄어드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 공간이 누군가에게 이유가 되지 못할 때 시작됩니다. 카미야마는 예술가를 초대해 마을을 열었고, 에치고츠마리는 논밭을 캔버스로 삼아 세계를 불렀습니다. 한국의 89개 인구감소지역 중 어디가 그다음 이야기의 무대가 될 것인지는 보조금을 얼마나 받느냐가 아니라 그 마을이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단비뉴스: "지방 재생의 모범, 카미야마" (March 22, 2023).
단비뉴스: "인재를 끌어들이는 카미야마의 새로운 지역 생태" (February 9, 2023).
건국대학교 피데스부동산개발사례연구센터: "일본 카미야마 마을(神山町)의 지방도시재생(創生)사업 사례", 부동산개발 사례연구 (2019).
경향신문 김진우: "예술은 지역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 일본 에치고쓰마리 '대지의 예술제' 20년 궤적" (September 17, 2018).
에치고츠마리 아트필드 공식 홈페이지: "About Echigo-Tsumari Art Field", echigo-tsumari.jp.
From A: "지붕 없는 뮤지엄, 에치고츠마리" (2022).
행정안전부: "인구감소지역 지정 현황" (2024).
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지방소멸 2025: 신분류체계와 유형별 정책과제", 지역산업과 고용 가을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