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V는 도시의 어디를 채우고, 어디를 비워야 하는가
미국 디트로이트 동부 지구에는 슈퍼마켓이 없는 반경 수 킬로미터의 구역이 존재합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주민들은 신선한 채소를 사기 위해 버스를 두 번 갈아탑니다. 영국에서는 농촌 지역 주민 다섯 명 중 하나가 식품 접근성 문제를 겪는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막연히 먼 이야기 같으신가요? 이것은 외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북 의성군에는 마트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고령층이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신선식품 판매처가 없습니다.
소멸위험지수 전국 1위, 인구 4만 명 미만의 이 지역에서 장을 보려면 택시를 불러야 합니다. 그 택시 요금이 아깝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혼자라서 두려운 노인들은 오늘도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지리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공간의 공백이 신체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동일합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곳에 새로운 대형 마트를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공간의 인프라를 채울 수 없다면, 이제는 서비스가 직접 사람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2026년 2분기, 의성군의 좁은 마을 골목길 사이로 작은 이동형 마트가 찾아옵니다. 민관이 뜻을 모아 소멸 위기 지역 주민들의 문 앞까지 신선한 식재료를 배달해 드리는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이 따뜻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PBV(목적 기반 모빌리티)' 기술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는 PBV에 대해 완전히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동차는 기존 생활 공간을 침해하는 위협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사회가 물리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공간의 결핍을 채우는 존재인가. 의성군의 작은 골목에서 기술은 후자의 맥락으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목적 기반 모빌리티 PBV 미리보기
도시가 만들지 못한 공간: 식품 사막과 의료 공백
PBV가 채울 수 있는 빈틈: 이동이 해결책이 되다
도시와 시골: 같은 기술, 다른 역할
공존의 조건: 도시가 설계해야 할 것
도시는 균등하지 않습니다. 서울 강남에는 100m마다 편의점이 있고 고급 식료품점이 줄지어 있으며 걸어서 10분 안에 병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남 고흥의 어느 마을에는 가장 가까운 내과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이 구조는 한국 고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의료 사막(désert médical)'이라는 단어가 이미 정책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농촌 지역 주민들이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현실이 수년간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캐나다 북부 원주민 거주 지역에서는 의사가 헬리콥터로 진료를 오는 것이 일상이며, 미국에서는 2010년 이후 농촌 병원 190여 곳이 문을 닫아 이 지역들을 '병원 사막(hospital desert)'이라 부릅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필수의료 공백과 부실한 의료 인프라가 지방소멸의 중요한 원인이자 결과라고 진단했습니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130곳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된 상황에서 신경과가 없는 시군구만 전국에 113곳에 달합니다. 사람이 줄었기 때문에 병원도 떠난 것인지, 병원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떠난 것인지는 이미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프랑스의 의료 사막이, 미국의 병원 사막이, 그리고 전남 고흥의 현실이 모두 같은 논리 구조 위에 서 있습니다.
이 거대한 구조적 공백을 고정된 건물로 채우는 것은 이제 경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 민간 인프라가 스스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달할 수 없는 인프라를 대신해 서비스가 직접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BV(목적 기반 모빌리티)의 이동성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PBV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움직이는 병원이자 달리는 약국이 되어 의료 사막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됩니다.
고정된 공간을 지을 수 없다면, 공간이 직접 사람을 찾아가면 됩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아이디어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실험되고 있습니다. 영국 농촌 지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이동식 도서관'이 마을을 순회합니다. 차량 한 대가 정해진 요일에 마을 광장에 서면 주민들이 모여 책을 빌리고 반납합니다. 도서관을 세울 수 없는 낮은 인구 밀도 속에서 이동하는 도서관은 문화 접근성의 최소 조건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일본은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초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지방 도시들에서는 '이동 슈퍼마켓'이 정규 서비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도쿠시마현의 '도쿠시마루'는 트럭에 400여 가지 상품을 싣고 일주일에 두 번 마을을 돌며 장사를 합니다. 일본 전역 800개 이상의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이 서비스는 노인들에게 단순한 쇼핑을 넘어 대화와 안부를 나누는 사회적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동하는 공간의 개념은 이미 존재해 왔지만 PBV는 이를 훨씬 정교하고 효율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우리나라 현대자동차그룹의 PBV 비전에는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는 PBV들이 한곳에 모여 종합병원을 구성하는 개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완전자율주행을 전제로 한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의성군의 신선식품 배송이나 도쿠시마루의 순회 판매처럼 당장 실현 가능한 영역들도 존재합니다.
더 넓은 적재 공간, 더 긴 운행 거리, 그리고 목적에 맞게 차량 내부를 재구성하는 유연성. 기존의 이동식 서비스가 결핍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면 PBV는 이러한 이동형 서비스를 도시 인프라의 정식 층위로 격상시킬 잠재력을 가집니다. 결론적으로 PBV가 가장 강력하게 기능하는 곳은 고정된 공간이 지어질 수 없거나 방치된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 두 가지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PBV 논쟁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서울에는 이미 카페가 넘쳐납니다. 골목마다 개성 있는 공간들이 치열하게 임대료를 감당하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 포화된 상권에 이동식 카페가 들어온다면 그것은 고정 비용을 면제받은 채 같은 고객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의 출현에 불과합니다.
반면, 의성군에는 신선식품을 파는 가게 자체가 없습니다. 이곳에 이동식 배송 서비스가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채우지 못한 공간의 결핍을 메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공급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뉴욕 맨해튼의 푸드트럭은 포화된 외식 시장의 또 다른 경쟁자지만,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카트리나 복구 현장의 이동식 의료 차량은 파괴된 병원을 대신해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런던 소호의 팝업 매장과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순회 약국은 똑같이 이동하는 공간이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은 완전히 다릅니다.
결국 같은 기술이라도 한 곳에서는 기존 상권을 위협하고 다른 곳에서는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불평등을 완화합니다. 기술 자체는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 기술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으로 작동하느냐에 있습니다.
킥보드가 처음 도시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이 새로운 모빌리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결과는 인도 위를 질주하는 킥보드, 아무 데나 버려진 기기들, 그리고 끊임없는 보행자와의 충돌이었습니다.
결국 파리는 공유 킥보드를 도시에서 추방했습니다. 반면 샌타모니카는 지오펜싱과 스마트 주차 기술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고, 헬싱키는 아예 처음부터 이 새로운 이동 수단을 대중교통 체계 안에 통합하여 설계했습니다. 세 도시의 운명을 가른 것은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도시가 어떤 질문을 먼저 던졌느냐의 차이였습니다.
PBV 역시 머지않아 같은 갈림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동하는 공간이 도시 어디서든 자유롭게 영업하도록 방치한다면 킥보드가 인도를 점령했던 것처럼 PBV는 기존의 골목 상권을 잠식할 것입니다. 반대로 도시가 PBV의 이동성을 의도적으로 설계한다면 그것은 물리적으로 채울 수 없었던 인프라의 결핍을 메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일본이 이동 슈퍼마켓을 지자체 복지 서비스로 편입시킨 것처럼, 프랑스가 의료 사막 해소를 위해 이동식 진료 차량에 공적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이러한 설계는 이미 가능한 현실입니다.
공존의 조건은 명확합니다. PBV가 이미 상권이 형성된 곳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소외된 곳에서 공급의 역할을 맡도록 구조를 짜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정책과 기획의 문제입니다.
이동하는 공간이 고정된 공간을 무분별하게 대체하면 도시는 고유의 기억을 잃습니다. 그러나 이동하는 공간이 고정된 공간이 닿지 못하는 틈새를 채울 때, 도시는 비로소 더 완전해집니다.
PBV는 도시를 해체하는 기술도, 무조건적으로 도시를 구원하는 마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서울경제: "기아, PV5로 행정안전부와 지방소멸 위기 대응 나선다" (2026. 3. 25)
서울경제: "PBV가 바꾸는 이동의 판 — 모빌리티가 라이프스타일 된다" (2025. 10. 6)
아시아투데이: "지방소멸 의료 실태 — 수도권은 출점 경쟁, 지방은 원정 전쟁" (2026. 3)
현대자동차그룹: "미래 모빌리티 비전 — PBV 개요", hyundaimotorgroup.com
기아 공식 홈페이지: "About 기아 PBV", worldwide.kia.com
USDA Economic Research Service: "Food Access Research Atlas", ers.usda.gov
도쿠시마루 공식 홈페이지: tokushimaru.co.jp
The Guardian: "Rural hospital closures in America — a crisis decades in the making" (2023)
Ministère de la Santé et de la Prévention (France): "Rapport sur les déserts médicaux" (2022)
CIAA / Chartered Institute of Logistics and Transport (UK): "Rural Mobility Report"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