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근무제는 도시의 시간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평일 오전 11시, 서울의 낮에 직장인의 자리는 없습니다. 카페는 재택근무자와 프리랜서, 학생들로 가득 찼고, 도서관 열람실은 취업 준비생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직장인들은 찾아볼 수 없죠. 그들에게는 이 시간에 도시를 쓸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레이캬비크의 금요일 오후는 다릅니다. 카페가 붐비고, 공원에 사람들이 거닐며, 도서관에서는 직장인이 여유롭게 책을 읽습니다. 그들이 유독 게으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도시는 노동의 굴레에서 금요일을 이미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4.5일 근무제를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 하루 덜 일해도 괜찮은지에 관한 생산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핵심을 비껴갑니다.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잃어버린 도시의 낮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유럽에는 이미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답한 두 나라가 있습니다. 한 나라는 10년의 실험 끝에 도시의 시간표를 바꾸는 데 성공했고 다른 나라는 법까지 만들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시간표 미리보기
10년의 기다림이 만든 금요일 오후: 레이캬비크의 시간표가 바뀌기까지
종이 위의 주 4일제가 실패한 이유: 법은 생겼지만 삶은 그대로인 벨기에
누군가의 야근이 만든 화려한 불빛: 서울의 야경이 서글픈 이유
우리는 언제쯤 도시의 낮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슬란드의 실험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레이캬비크 시의회와 아이슬란드 정부가 이 실험에 나선 것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가 먼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내려온 정책이 아니라 아래에서 쌓인 요구가 만들어낸 실험이었습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레이캬비크 시의회와 중앙정부는 2,500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주당 근무시간을 40시간에서 35~36시간으로 줄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임금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보다 방법입니다. 절약된 시간은 단순히 퇴근을 앞당기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불필요한 회의를 없애고, 교대 계획을 바꾸며, 근무시간 중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하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근무시간을 줄이면서 실제로 생산성이 향상됐고 아이슬란드는 주 4일 근무로 전환함으로써 유럽 대부분을 앞지르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이 실험을 토대로 노동조합은 근무방식을 다시 협상했고 아이슬란드 노동 인구의 86%가 같은 임금을 받고 더 적은 시간을 근무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에는 조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실험 참여자들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취미 활동을 하며, 집안일을 끝낼 수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동시에 평일 낮의 카페가 채워지고 공원에 직장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가 설계한 공간들이 비로소 시민들의 삶 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레이캬비크의 성공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총량을 줄였다는 것, 그리고 사회 전체가 함께 합의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아이슬란드가 성공했다면 벨기에는 실패했습니다. 2022년 2월, 벨기에는 유럽 최초로 4일 근무제를 법으로 만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 4일제를 법제화한 최초 국가로서 법안을 통과 및 전면 적용하였고, 당시 세계 언론은 이것을 역사적 선언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벨기에의 모델을 들여다보면 이유가 보입니다. 벨기에 주 4일제의 특징은 근로자 요청에 따라 주당 근무 일수를 단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4일 일하고 싶은 근로자는 하루 최대 근로시간을 8시간에서 9시간 30분으로 늘리면 됩니다. 즉, 총 근무시간은 그대로입니다. 40시간을 5일에 나눠 일하던 것을 4일에 압축한 것입니다.
벨기에에서는 압축 노동으로 노동 강도가 심화되고 근로자의 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9시간 30분으로 늘어난 4일이 과연 삶을 바꾸는가, 많은 노동자들이 회의적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아이슬란드와 벨기에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이슬란드는 총량을 줄였고, 벨기에는 시간을 재배열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의 10년 요구가 만들어낸 실험이었고, 벨기에는 정부가 위에서 선언한 법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일하는 방식 자체를 설계했고, 벨기에는 달력만 바꿨습니다.
벨기에의 사례는 4일 근무제 논쟁에서 가장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법이 있다고 문화가 바뀌는가?", 도시의 시간표를 다시 쓰는 것은 입법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전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입니다. 선언만으로는 금요일 오후 2시의 도시가 바뀌지 않습니다.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습니다. 밤 10시에도 빌딩마다 불이 켜져 있고, 도시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화려한 불빛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야근이 만들어낸 이 빛은 역설적이게도 낮이 텅 비어버린 도시의 슬픈 이면입니다.
사실 오래 일하는 것과 잘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노동시간이 긴 나라일수록 시간당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적다는 것은 OECD 데이터가 일관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당 근무 시간이 길어지면 불필요한 회의가 늘고, 주의력은 분산되며, 일의 밀도는 떨어집니다. "업무는 주어진 시간을 꽉 채울 만큼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이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죠.
데이터보다 더 선명한 증거는 우리의 일상 풍경에 있습니다. 평일 낮의 공원은 은퇴한 노인들의 몫이고, 카페는 재택근무자들의 사무실이 되며, 번화가는 해가 져야만 비로소 깨어납니다. 도시가 품고 있는 공간의 절반이, 하루의 절반 동안 직장인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피곤하다는 투정이 아닙니다. 공원과 도서관, 문화 시설과 동네 카페처럼 세심하게 설계된 도시의 인프라가 정작 시민들의 삶 속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훌륭한 공간을 지어놓고도 정작 그것을 누릴 시간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한국에서 주 4.5일제 논의가 수면 위로 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겠느냐고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아이슬란드와 벨기에의 사례는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우리에게는 일하는 시간의 총량을 과감히 줄일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온전한 삶으로 채울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할 의지가 있는가.
아이슬란드와 벨기에의 차이는 결국 하나로 요약됩니다.
아이슬란드는 시간을 줄였고, 벨기에는 시간을 옮겼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사회가 함께 요구했고, 벨기에는 정부가 혼자 선언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일하는 방식을 다시 설계했고, 벨기에는 달력만 바꿨습니다.
4.5일 근무제는 하루를 더 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회의를 없애고 보여주기식 야근 문화를 걷어내며 집중해서 짧게 일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노동 정책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바라보는 방식 전체를 바꾸자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오후 2시, 당신은 어디에 있고 싶습니까?
그 대답이 지금 우리 도시의 시간표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이 질문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우리의 합의로만 가능합니다.
Haraldsson, Guðmundur D. & Kellam, Jack. Autonomy & ALDA: "Going Public: Iceland's Journey to a Shorter Working Week" (June 2021).
Haraldsson, Guðmundur D., Kellam, Jack & Trickett, Rowan. Autonomy Institute & ALDA: "On Firmer Ground: Iceland's Ongoing Experience of Shorter Working Weeks" (October 2024).
Belgian Federal Government: "Labour Deal — Four-Day Work Week Legislation" (November 2022).
서울경제: "유럽 '노동 없는 사회' 실험 시작…韓은 논의조차 못해" (February 11, 2026).
OECD: "Hours Worked — Average Annual Hours Actually Worked per Worker", OECD Employment Statistics (2023).
이코노미스트: "짧아진 근무, 늘어난 만족…해외에선 '주 4일제' 실험까지" (October 1,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