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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비 Nov 03. 2023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고요?

보건교사의 기쁨과 슬픔

나는 보건교사다. 직업을 소개하는 순간, 부러움이 쏟아진다.     


 “우와, 그거 정말 편한 직업 아닌가요?”

 “방학도 있고 수업도 안 하고 교사 중에 제일 꿀 빠는 교사 아닌가요?”

 “학교에서 독방을 쓸 수 있는 단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보건교사잖아요.”  

    

 그렇다. 매우 안정적이고 세상 편한 직업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점을 이해한다. 원래 어지간한 직업의 경우 남 일은 쉬워 보인다. 그중에서도 유독 보건교사라는 직업에 관해 너무 쉽게 ‘부럽다’라는 말을 내뱉는 세상의 이들에게 보건교사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아무리 쉬워 보여도 먹고사는 일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할까.     


 보건교사가 되기로 한 건 간호사로 병원을 다닐 때 같은 기숙사방을 쓰던 룸메이트의 영향이 크다. 3교대 근무를 하고 밥도 잘 못 먹어 말라가던 그 시절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어느 날 동고동락했던 룸메가 편지 한 장을 책상 위에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부산의 모사립학교에 기간제 보건교사를 하기로 했다면서 말이다. 그 당시 룸메가 병원 일로 매우 힘들어하던 시기였기에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결정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룸메가 양손에 사과와 배를 사 들고(추석 즈음이었던 것 같다) 산뜻한 초록색 피케티와 베이지색 치마를 입고 한층 밝아진 얼굴로 기숙사를 방문했다. 황금연휴를 맞아서 서울에 놀러 왔다며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짓는다. 헉~ 같은 사람이 맞나? 병원 일에 찌든 나도 보건교사가 되면 저렇게 밝아질 수 있으려나?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호사로 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학교에서 여유 있게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 근무를 하러 간다든지, 식사는커녕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일하지 않고 싱그러운 아이들과 함께 우아하게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당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야심 차게 캐리어를 끌고 고향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나 이제부터 임용 공부해서 보건교사 될 때까지 도전할 거야!” 한 번에 붙을 줄 알았던 임용고시는 당시 40대 1의 경쟁률 앞에 눈물을 삼키고, 재수 끝에 겨우 합격 (이걸 문 닫았다고 표현하나요?) 하게 되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처음 발령 난 곳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전교생 70여 명의 벽지 초등학교. 읍내에서 30분을 굽이굽이 차를 타고 들어가야 겨우 닿을 수 있었던 그곳에 당직실을 급히 개조해서 만든 보건실이 나의 첫 일터였다. 모든 교실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서 한낮에도 해가 전혀 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추운 산골인데 더더욱 냉기가 심해 손과 발이 항상 시렸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남향 보건실에서 커피 한잔을 하며 운동장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여유 넘치는 보건교사를 꿈꾸던 나의 상상은 이내 깨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 달랐지만 이렇게 합격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즐겁게 일하려 했으나 현실의 벽에 자주 부딪히곤 했다.    

  

 “보건샘~ 할 일 없으면 가만 앉아 있지 말고 나와서 같이 밭이나 매러 가요. 이제 텃밭에 모종 심어야 하는데 같이 하면 좋잖아?”라고 내가 심심할까 봐 걱정해 주시는 아버지 또래로 보이는 주사님의 한마디는 나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 “보건실은 조용하니깐 여기서 두릅 삶아서 가져가도 되죠?” 라며 오지라퍼 유기농주의 유치원 선생님도 거든다.     


  장롱면허는 있었지만 차가 없던 나는 선생님들과 카풀을 해야 했는데, 왕복 한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 동안 아침에 뭐 먹었냐부터 소소한 가족사, 주말에 할 일들까지 공유하는 그런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친밀한 사이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첫 월급을 타고 뭔가 한턱내야 할 거 같아서 고민하자 같은 카풀팀인 친절한 교무부장님께서 직접 떡방앗간에 가서 쑥떡을 해와서 차에 싣고 와주셨다. 혼자 자취하던 쓸쓸한 저녁시간, 맛보라며 고기와 버섯을 주고 가신 (그때는 나가기 귀찮았으나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분들이다) 선생님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나저나 보건 선생님도 시험 쳐서 되는 거 맞죠?”

  “네~ 맞습니다!! 보건교사도 교직 이수하고 임용시험 쳐서 되는 거랍니다. 그냥 서류 내고 면접 보고 들어온 거 아니에요~”

 “그럼 정년도 보장되고, 퇴직금도 받겠네? 정말 보건교사는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하는 거 맞네, 맞아!”

 “네~ 감사합니다. 제가 전생에 복 많~이 지었나 봅니다. 하하.”

이렇게 나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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