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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혜성 Nov 08. 2023

[Movie] 장률의  《경주》 (2014)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를 담은 찻잔

경주를 떠올리면 줄줄이 사탕처럼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수학여행, 첨성대, 줄 서서 사 온 황남빵, 보문 단지에서 먹은 교리 김밥 등등.

그때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보다가 문득 황남빵이 먼저였는지, 교리 김밥이 먼저였는지, 첨성대가 먼저였는지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 같다. 그래도 뚜렷하게 생각나는 건 확 트인 시야에 봉긋하게 자리 잡고 있는 능이다. 참으로 이상하다. 이토록 크고 많은 무덤 사이를 거닐면서 단 한 번도 경주가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니.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영화는 공항에서 시작한다.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은 창의형(김학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 공항에서 담배 한 까치를 들고 냄새만 맡고 있는 현이에게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여기서 담배 피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 중국산 담배를 들고 아이와 스몰토크를 하던 중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택시를 타고 떠나고 현이도 창의형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장례식장의 육개장 앞에선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다. 춘원이형(곽지형)은 창의 형이 죽기 3년 동안 두문불출한 이유가 창의형의 아내에게 있다며 자신의 직감과 소문을 뒤섞어 이야기하고, 최현은 뜬금없이 7년 전 경주 여행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찍어준 창희형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마주 해서였을까, 세 사람이 모여서였을까? 최현은 경주를 가보기로 한다. 도착해 자전거를 빌려 달린다. 능 사이에 애정행각을 벌이는 학생들과 능 위로 뛰어올라가려는 유치원생들, 그들을 바라보다 현이는 후배 여정(윤진서)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경주로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찻집에 도착한다. 황차를 주문하고 창희, 춘원이형과 7년 전 앉았던 그 방에 자리 잡는다. 벽지를 들여다보고 만지고 있는 현이에게 공윤희(신민아)는 '벽에 뭐 묻었어요?'라고 말한다. 최현은 윤희에게 벽에 있던 춘화에 대해 묻고, 윤희는 3년 전 찻집(아리솔)을 인수하고 손님들이 농을 해대는 탓에 벽지로 발라버렸다고 대답한다. 윤희는 7년 전 본 춘화 때문에 이곳에 온 최현이 수상하다.

최현은 경주에 도착했다는 여정의 연락을 받고 찻집을 나선다. 기차역에서 만난 윤희는 뭔가 퉁명스럽다. 옛이야기로 대화를 이끌려는 현이에게 윤희는 날이 선 말들만 내뱉는다. '앞으로 나한테 애가 없대' 점집 할아버지의 점괘를 말해주곤 울어버리는 여정. 울리는 핸드폰을 보고 급히 가봐야 한다는 여정. '그때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잖아요'라고 옛이야기를 꺼내는 여정. 이제 그녀의 날이 선 태도가 납득이 된다. 여정을 배웅하고 보문 단지를 걷고 관광안내소도 들러보고 대숲도 가본다. 그리고 대구에서 만난 노란 원피스 아이를 만나 손도 흔들어 준다.


찻집으로 돌아온 최현은 일본인 관광객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과거 일본의 잘못에 대한 사과도 받는다. '저는 낫토를 정말 좋아합니다' 최현의 대답은 윤희의 통역에 의해 변질됐지만 의미는 전달된 듯하다. 다시 그 방에 앉은 최현은 형수님(창희형의 아내)을 마주한다.


창희 씨는 절대 누구한테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그 죽음은 창희 씨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하지만 자살은 아니에요. 그건 정말 아니죠.
고승들은 자신들이 열반하는 날짜를 스스로 결정하잖아요. 최 선생님도 아시죠?


카메라가 느린 호흡으로 빈 벽을 비추고 다시 내쉬면서 제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형수가 앉았던 자리엔 윤희가 있다.



한바탕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졌다. 최현은 윤희를 따라 모임에 참석한다. 북한학을 가르치는 박 교수(백현진), 플로리스트 강 선생(류승완), 윤희의 친구 다연(신소율), 그리고 최현을 경계하는 영민 씨(김태훈)까지. 영민은 경찰이다. 보문호수에서 자살한 모녀 사건 때문에 늦게 도착했는데, 아이가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지 않았냐는 최현의 말과 최현을 챙기는 윤희 때문에 그가 더 못마땅하다. 2차로 노래방까지 땡기고 영민, 최현, 윤희는 걷기 시작한다. 풀벌레 울음소리와 가로등과 달빛, 그 속에 봉긋 솟은 능의 머리에 셋은 올라갔다. 윤희는 능의 정수리에 대고 말한다. "들어가도 돼요?" 옆의 능에선 최현이 누워있다. 그러다 경비원에게 걸려 조상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혼이 나는데, 영민을 알아본 경비원은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냐며 자세를 고친다.

오늘 저기 보문 호수에서 자살 사건이 있어서  지금 용의자가 이쪽에 지금 왔다고 얘기 들어서 -영민


아, 자살 사건 용의자
-경비원


영민을 보내고 윤희는 최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윤희의 집 커튼을 걷으니 선명해지는 풀벌레 소리와 능이 보인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 살기 힘들어요


그렇다. 경주에선 마음만 먹으면, 아니 마음을 먹지 않더라도 능을 볼 수 있다. 능이 아니라도 죽은 자들이 남긴 것들로 가득 찬 도시이다. 마치 찻잔에 고인 황차처럼, 시간이 고여버린 도시 같다. 그 사이사이에 산 사람이 비집고 자리 잡고 있다. 장률 감독은 95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경주를 방문했고, 경주의 무덤과 보통의 삶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점이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경주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모호한 경계의 도시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적으로 피라미드, 진시황릉, 고인돌 등 많은 무덤이 있지만 경주의 능처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뒤섞여 사는 곳은 전무후무하다. 능을 가로질러 등교를 하고, 퇴근을 하고, 산책을 하고, 또 집에 와 창문을 열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주=수학여행이라는 공식에 익숙해진 우리가 놓친 것을 이방인 장률 감독은 느낀 것이다. ​

최현은 윤희 집에 걸린 봉자개(펑쯔카이)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펑쯔카이는 중국의 수필가이자 교사이자 화가다.) 그 그림은 윤희의 남편이 죽기 전 가져온 것이다. 봉자개는 문학 중 시를 으뜸으로 삼았는데, 이 그림에도 시가 쓰여있다. 최현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윤희는 뜻을 물어본다. ​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다음날 아침 윤희의 집을 나선 최현은 전날 여정이 점을 봤던 곳을 찾아간다. 전날 만난 할아버지를 찾으려 했지만 그의 손녀에게서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최현은 뛰쳐나간다. 그리고 눈앞에서 전날 본 경주 폭주족들이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고 찾아 헤맸던 돌다리까지 오게 된다. 메마른 하천 바닥에선 물소리가 흐른다.


윤희는 최현이 들여다본 벽지를 바스락 뜯고, 이윽고 방 안엔 최현, 창희, 춘원이 춘화를 보며 농을 한다. 그리고 들어오는 찻집 주인은 윤희를 닮아있다.



<경주>는 장률 감독의 도시 3부작 중 첫 편으로 이후 <군산:거위를 노래하다>, <후쿠오카>를 제작했다. 장률감독의 필모를 보면 펑쯔카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장률 감독은 중문학을 전공해 대학 교수직까지 역임하며 베이징에서 소설로 등단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장률 감독의 영화는 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경주>의 카메라 움직임은 느린 호흡으로 읽는 시 같고,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최현을 따라가며, 주변의 캐릭터들의 등장은 시간의 흐름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보이지 않는 액자식 구성이 연상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1. 윤희는 실재인가?

2. 여정과 할아버지에게 점을 봤던 건 과거인가?

3. 3년 전 춘화를 보고 농을 했던 건 최현의 일행이었을까?

사진은 실체의 증거다. 최현이 아리솔을 찍어두고 싶다고 하자 윤희는 사진 찍히는 것이 싫다며 최현의 뒤에 숨어 있는 장면은 존재 증명을 회피하는 듯 보인다. 여정이 점을 보았던 할아버지의 부재도, 과거 경주 여행에 등장하는 윤희도 각자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든다. 영화는 시작부터 줄곧 우리 주위에 공존하는 죽음을 맴돌고 있다. 창희형의 장례식에서부터 모녀의 자살, 폭주족의 사고. 일련의 사건들은 툭툭 튀어나와 죽음을 상기시키지만 알고 보면 '능'처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와 현재, 생과 사의 선들이 4차원의 공간에서 무심하게 제각각 교차한다. 극장을 나오는 순간, 내 삶에 무심하게 그어진 선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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