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소녀의 마지막 질문이 귓가에 맴돌아, 현실 감각이 희미해진 채였다. 그날 밤, 소년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강렬한 명암으로 그려진 책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심장을 뛰게 하는 사막의 태양, 온몸에 힘이 넘치게 하는 녹음,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넓은 빙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설명하던 소녀의 반짝이는 얼굴, 자신을 바라보던 깊은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다음 날, 소년이 마주한 마을의 풍경은 어제와 똑같았지만 소년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일까? 소녀의 말처럼 이 잿빛 세상은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버린 미완성의 그림인 걸까? 늘 오가던 잿빛 길은 유난히 텅 비어 보였고,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소년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공허함을 느꼈다.
그날 오후, 소년은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잿빛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여전히 소녀가 보여준 그림으로 가득했다. 저 강물이 그림 속 빙원처럼 깊은 고요함을 품게 된다면? 지금 앉아 있는 이 잔디가 그림 속 숲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숨 쉰다면? 머리 위를 비추는 저 태양이 그림과 같이 심장을 뛰게 하는 뜨거움을 품게 된다면?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잿빛이었고, 마을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다. 하지만 어제의 일을 되새길 때마다, 소년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년은 언덕에 홀로 앉아 있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무릎에 턱을 괸 채, 변함없이 잿빛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소녀는 이 세상 누구도 꾸지 않는 꿈을 혼자서 꾸고 있었다. 이 세상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혼자서 그리고 있었다. 그 외로움의 무게가 소년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소년은 깨달았다. 책의 내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소녀가 더 이상 상상 속에서만 세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감각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소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소녀가 있는 언덕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들은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눈이 의아함으로 동그래졌다.
소년은 소녀의 앞에 서서, 서툴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찾아올게."
"… 뭐를?"
소녀가 되물었다. 소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평생의 용기를 다해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세상. 책 속에 있던 그 뜨거움, 그 싱그러움, 그 고요함. 내가, 너에게 가져다줄게."
그것은 세상의 운명을 건 영웅의 선언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한 소녀가 다락방에서 홀로 품어왔던 비밀이, 소년을 만나 두 사람만의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고, 이제는 그 모든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는 한 소년의 가장 순수하고 무모한 약속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정말이야?"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소년의 단단한 눈빛을 보자, 소녀의 얼굴에 서렸던 기쁨 뒤로 진지한 염려가 차올랐다.
"하지만 위험할 거야. 책에 그려진 곳들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인걸. 그리고, 설령 그곳에 간다고 해도... 정말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소녀의 목소리에는 소년을 걱정하는 진심 어린 무게와, 아직 남은 현실적인 의심이 실려 있었다. 그 걱정과 의심이 담긴 눈빛에, 소년은 오히려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드럽지만, 세상에서 가장 확신에 찬 미소로 대답했다.
"괜찮아. 네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그 소박한 믿음 한마디에, 아주 오랜 시간 잿빛으로 잠들어 있던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직 이름 모를 빛무리가 아주 희미하게 일렁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