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학급 호구조사
국민학교 4학년 새 학기가 되면서 나는 이곳 안성으로 전학을 왔다.
입을 옷조차 별로 없어서 봄이 무르익도록 낡은 겨울 점퍼를 입은,
키도 작고 깡마른 창백한 얼굴의 소녀...
그게 나였다.
내가 예전에 다니던 시골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 그것도 한 학급에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작은 분교였다.
그런데 여기는 한 학년에 8~9 학급이나 있었고, 한 반에 학생들이 50명도 넘게 있었다.
기가 죽을 만도 했다.
그 낯선 곳에서, 초라하고 여린 내가 나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국민학생들도 매월 학력평가를 치렀는데, 전학 후 처음 본 시험에서 나는 전교 1등을 했다.
4학년 대표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볼품없는 저 여자아이에게 1등 자리를 내주었다는 게 몇몇 상위권 아이들에게는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나 보다.
교실에서 나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그 눈빛들이 나는 무서웠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나는 표창장을 가방 속에 재빨리 숨겨 버렸다.
더 서러운 일은 며칠 뒤에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아침 조례를 마치시고는 갑자기 난감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집에 TV 있는 학생 손들어 봐."
아이들이 손을 든다.
"집에 냉장고 있는 학생 손들어 봐."
아이들이 손을 든다.
"집에 전화 있는 학생 손들어 봐."
아이들이 손을 든다.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이상 나온 학생 손들어 봐."
아이들이 손을 든다.
"어머니께서 고등학교 이상 나온 학생 손들어 봐."
아이들이 손을 든다.
.
.
.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손을 들지 못했다.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었다.
TV, 냉장고, 전화, 이불장, 책상, 밥솥...
엄마아빠의 중학교 졸업장까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거의 맨몸으로 쫓겨오다시피 해서 시작한 안성에서의 비참한 나의 생활은
그날 학교에서 낱낱이 들춰졌다.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갔고, 고개는 자꾸만 숙여져 애먼 책상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쥐구멍이란 단어는 이런 나를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었다.
19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호구조사라는 거창한 말로
가난하고 어려운 학생들의 자존심을 마구마구 뭉개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도 그중 한 학생이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질문이 계속되면서 슬슬 아이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쟤는 언제 손을 드나... 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키득키득하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공부 좀 한다고 잘난 척하더니 그것 참 고소하다' 라는 의미라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날 결국...
나는 손을 한 번도 들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껴안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길의 끝이 없기를 바랐다.
길의 끝에 닿아 있는, 낡고 다 쓰러져가는 흙벽집.
더없이 허름한 부엌에서 우악스레 쌀을 씻으며
또 눈물짓는 엄마를
그날,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