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하여
나에겐 오래된 일기장이 있다.
나에겐 오래된 일기장이 있다. 짙은 녹색의 하드커버 일기장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만든 일기장이니, 제법 오래된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일기장은 일기장이 아니다. 그도 그런 것이 일기장이라는 것은 보통 하루하루의 일을 기록하거나 그날 느낀 어떤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일기장은 기록의 단위가 거의 반년에서 일 년 가까이 된다. 마지막 기록은 10년도 넘은 것 같다. 즉, 일기장(日記帳)이라는 것에 어떤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래의 단어가 지닌 뜻에 비추어 보자면 그 자격에 한참 미달한다고 할 수 있다. 연기장(年記帳)이나, 아니면 차라리 그냥 기약이 없는 무기기장(無期記帳)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자유로운 글쓰기를 오랜만에 해보려고 하니, 무엇부터 시작해보아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그 일기장, 아니지. 그 짙은 녹색의 하드커버 무기기장이 불현듯 떠오르고만 것이다. 표지는 여기저기 해졌지만 내용물은 깨끗하던 그 노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노트가 새것이었을 때, 첫 장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 마음은 지금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의 조각을 글로써 남기고, 그 과정 중에 어떤 의미를 길어 올리거나 혹은 나중에 다시 예전의 글을 들여다볼 때, 내 과거의 일과, 생각들을 톺아보며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거창한 뜻이나 이유가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니다. 잔뜩 힘을 주고 처음부터 한 번에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 얇은 노트마저 다 채우질 못했던 이유는 내가 너무 과분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행동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힘을 빼고 가볍게 시작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수필이 될지, 어떤 전문 분야의 글이 될지는 나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은 오래간만에 시작하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즐길 것이다. 매일 조금씩 글을 써보려고 한다. 한 땀 한 땀 쓰다 보면 뭐가 됐든 되어 있겠지 싶다.
2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미처 다 채워지지 않았던 그 오래된 일기장은 게으른 나에게 어떤 감정이야 없겠지만, 과거의 그 나름대로 바빴을 시절에 당찬 마음으로 일기를 시작했던 나는 미래의 나들에게 뭔가를 따져 묻고 싶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미래의 나들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렇게 그 일기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뭔가 예전의 나에게 덜 민망해지는 기분이다.
바라건대, 이 공간이 새로운 오래된 일기장이 될 수 있도록 가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적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