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살아남기
일을 그만두고 약 2주 동안 세컨비자를 위한 88일 근무조건을 채울 곳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고 놀기만 했지 제대로 된 구직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고 구직활동은 귀찮기만 했다. 사실 어찌 보면 운 좋은 시기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굳이 세컨비자를 위해 오지에서 농/공장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세컨비자를 충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서비스직종에 근무하기.
기존 세컨비자 발급 조건은 퍼스트 워홀비자 소지기간 내에 낙후된 지역에서 농/공장 혹은 광업, 임업, 어업, 산불피해 복구작업을 88일 동안 하면 세컨 워홀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판데믹으로 빠져나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워홀비자 소지자를 대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서비스(Hospitality) 직종에 근무하더라도 세컨비자를 발급해 준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굳이 시골 깡촌까지 가서 농/공장에 일하지 않아도 비자 조건에 일치하는 지역(우편번호 기준)에서 서비스직에 근무하면 된다. 즉 호텔이나 식당, 카페일을 하고도 세컨비자를 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여전히 지역제한이 있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케언즈 같은 곳에 아주 시골은 아닌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둘째, 코비드 비자 신청하기.
호주 정부가 코비드 비자를 신설하여 특정 기간 동안 호주에 머문 사람들이나 특정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최대 1~4년까지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 코비드 비자의 경우 워낙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비자라는 게 워낙 깡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소문만 무성하여 이것만 믿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너무 불안했다. 비자만료 90일 전, 만료 이후 30일 이내 신청 조건이 있다 보니 거절이 된다면 세컨비자에는 도전도 못해보는 일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보다 확실하면서도 별로 내키지 않는 농공장일은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옵션을 염두에 두고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호주 이민성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우편번호를 하나하나 대조해서 이 일자리가 조건을 충족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고, 세컨비자 충족이 된다는 공고를 믿고 단번에 지역을 옮기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일을 구하고 지역을 옮기고 싶었던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성급한 일은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이력서를 돌리고, 연락을 기다리고, 면접을 보는 귀찮고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세 번째 옵션인 '기존' 세컨비자 조건 충족하기를 선택했다. 세 달 동안 그냥 죽은 듯이 일만 할 생각으로 무려 '한인농장'에 컨택을 했다. 이때는 몰랐다. 시간과 노력을 조금만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을 뒤로한 대가가 얼마나 쓸지.
밤 열두 시,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해서 나와 한 팀이 되실 분의 차량을 타고 공항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를 곳으로 향했다. 나는 거기가 악명 높은 농장이 모여있는 카불쳐라는 곳인지도 나중에 알게 됐다. 아니, 어쩌면 그냥 한인농장이 지독한 것일지도.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얼마나 달렸는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그때의 불안함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긴장해서 한 껏 경직된 몸과 뜬 눈으로 잠에 들길 기다렸지만 한숨도 못 자고 벌써 출근할 시간이 다 됐다. 새벽 5시, 모두 부지런히 각자 끼니를 때우고 준비를 하는데, 나는 새벽에 도착해서 장도 못 보고 와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다른 쉐어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간의 시리얼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같은 팀 일행과 함께 농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호주 시골 특성상 차가 없으면 이동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차량운행이 가능한 사람을 필두로 팀을 짜서 같은 집에 머물며 일을 하는 구조인 듯했다. 아무튼 트롤리를 끌고 사진에 있는 검은색 딸기 레일(?)을 하나씩 맡아서 따는 거다. 이걸 하루 할당량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도, 음악도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시간 동안 주야장천 딸기를 따는 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단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만 일해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88일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호주 워홀 가서 얼마 벌기' 등의 콘텐츠를 많이 보았다. 너도 나도 그런 호주 워홀 콘텐츠를 만들기에 나는 그게 워홀 온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간단하고 쉬운 일인 줄 알았다. 마치 1년만 있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진짜 워홀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각자 걸어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그러나 와보니 알았다.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주변을 돌아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흔한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시내버스만 타면 쉽게 읍내가 있는 한국의 시골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장을 보러 갈 때도 팀 내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주 1회 40분 거리의 시티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여있는 사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온 사람들끼리 친분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여기에 몇 년 있으면서 얼마를 모았다는 걸 마치 트로피 마냥 자랑한다. 현실은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그들 사회에 녹아들 노력이나 생각은 없고 , 이제와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회생활에 뛰어들긴 늦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곳에서 정치질을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고여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날 업무가 끝난 당일 집으로 돌아와 나는 일을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운전을 담당하는 사람이 매니저급인 듯했다. 곤란한 듯 보였지만 내게 아직 계약서도 쓰지 않았으니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기 있는 게 그리 득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 내게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 조용히 가라는 게 아니었을까. 밤을 새고 근무하고 돌아와 긴장이 풀린 나머지 곧바로 잠에 들었다. 한 여성분이 내게 밥을 먹을 거냐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눈을 떴는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한국에서는 불을 끄고 누워도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빛으로 약간의 구분은 가능한 정도지만 여긴 아니다. 순간 내가 장님이 된 건 아닌가 하고 눈을 비볐다. 핸드폰을 찾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결국 이렇게 도망칠 기회를 놓쳐버린 줄 알았다. 다행히 핸드폰 시계는 저녁 6시를 나타내고 있었고 모두 어딜 갔는지 집안이 고요했다.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새벽에 들어와 계약서도 쓰지 않고 장도 보지 않았던 게 되려 다행이었던 걸까. 열려있던 캐리어를 닫기만 하고 서둘러 우버를 불렀다. 시티까지 130불이 나왔다. 한화로 약 12만 원 정도인 셈인데 망설임 없이 호출을 눌렀다. 짐을 밖으로 빼고 있는 와중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한 남성분이 나와서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셨다. 그리고는 낮에 내가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장 보러 나간다고 했을 때 안 가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도 떠나는데 배웅해 줄 사람이 있어야 덜 외롭지 않냐면서 말이다. 자기도 일주일 뒤에 나간다고 했다. 처음에 말한 조건과 막상 왔을 때 조건이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하늘을 바라보라고 했다. 이곳 하늘이 정말 백만 불짜리라고. 은하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 그대로 '빼곡히'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여기 머무는 유일한 낙이라고 하셨다. 이 분 덕에 그나마 이곳에서의 기억이 나쁘지 않게 기억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긴장감과는 사뭇 반대된 감성의 하늘을 잊지 못한다.
시드니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호스텔도.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일과 집을 구해야 했다. 어쩐지 시작이 너무 수월하다 했다. 내일부터 내가 묵었던 집과 직장에 다시 컨택을 해볼 생각이다. 일상을 되돌리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