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살아남기
시드니 돌아온지 삼일째 되는 날에 바로 집을 구해서 호스텔에서 여러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었다. 사실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친구 사귀고 놀러다니는 것도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는데 이참에 원없이 해보게 생겼다. 시드니로 다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직장 되찾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에 일했던 곳에 가서 '다시 돌아오기 늦지 않았지?' 라고 능청스럽게 굴었다. '물론이지!'라며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비자 따겠다며 비행기값이며 택시값이며 쓴 돈을 빨리 메꿔야 했다.
호스텔에서 만난 윌리엄이 월드스퀘어에 있는 카렌스 키친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영미권에서 카렌은 성격이 까다롭고 못되먹은 여성을 일컫는 대명사 느낌이다. 그래서 이 식당은 종업원들이 매우 무례한 컨셉을 가지고 있다. 손님에게 메뉴판을 집어 던지거나 질문을 하면 화를 내는 등의 행동을 한다. 그런데도 예약이 꽉차있어 윌리엄도 겨우 예약을 했다고 했다. 덕분에 이런 컨셉의 식당도 와보았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호스텔 사람들끼리 당구장에 갔다.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한국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독일사람들이 무뚝뚝하고 FM이라는 고정관념이 왜 생긴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 나치의 영향일테지만, 내가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친구들은 대부분 독일 친구들이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당구를 치곤했다. 승부보다는 웃음 욕심이 있는지 다리 사이에도 끼워보고 누워서도 쳐보고 팔꿈치로도 쳤다. 웃음이 끊기질 않았다.
하루는 남미 클럽에 갔다. 이번에는 독일, 네덜란드, 브라질, 콜롬비아 친구들과 함께였다. 남미 사람들의 열정이 한 몸에 느껴졌다. 대학 시절 배운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에 따르면 청년기에 가장 중요한 과업이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오면 젊은 남녀가 얼마나 그 과업에 충실한지 몸소 느낄 수 있다. 국적만으로 사람의 특성을 나누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어느 정도 문화적 배경이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 무시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인간의 특성이 참으로 흥미롭다. 강아지도 큰 틀에서 보면 강아지지만, 진돗개, 말티즈, 치와와 등으로 나뉘듯 같은 인간이지만 유럽, 남미, 아시아 마다 그 특성이 다르니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마테오가 'The Queen is dead' 라고 했다. 나는 순간 무슨말인가 싶었다. 퀸? 여왕? 알고보니 영국여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영국 여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국가의 국민도 아니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아 그래?' 정도로 넘겼지만 영국인 남자친구가 있는 마테오는 모두가 여왕을 좋아했다고 했다. 영국 여왕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에서 일주일간 영국여왕의 이미지를 띄워놓았다. 곧 떠나는 스탠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갔는데, 영국여왕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스탠은 "Who cares?" 라고 했다. 의외였다. 서양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영국여왕에 대해 관심이 있고 크게 와닿는 일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대단한 영국여왕도 모두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 내가 뭐라고 이 복잡한 세상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몰랐던 호스텔 생활을 인간관계로 달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