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바다에 사는 여러 물고기가 있는 색칠공부책을 색연필로 색칠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1) 그때는 미리 그려진 선 안에서 색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고기들을 멋지게 색칠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크레파스를 들고 스케치북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물고기의 모양을 그려주는 선이 없어지고, 내가 원하는 형태로 자유롭게 물고기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빈 도화지에 그리는 사람의 창의력과 감정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색, 모양의 물고기 그림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물고기라는 생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그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회의 기대와 규칙이 보이지 않는 선처럼 있어서 내가 자유롭게 나의 자아를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 같았다.
사진 1: 어린이들이 쓰는 색칠공부책의 한 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olor_this_sea_world.svg 무료이미지)
다행히 거대한 사회적 규칙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다. (사진 2) 초중고 시절, 아버지와 함께 둘이서만 대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한참 걸어서 유서 깊은 음식점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집에 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우래옥이나 필동면옥, 명동 칼국수 같은 음식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놀고 외출하는 것도 좋았으나, 이렇게 아버지와 단둘이 다닐 때는 뭔가 특별하게 장녀를 생각해 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22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소중히 기억하는 그분의 말씀, ‘문화는 우리가 잘 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화 중에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것들이 있단다. 문화니까 어쩔 수 없다 하지 말고 고칠 수 있는가를 봐라.’ 이러한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이 살아가면서 내가 여러 결정을 할 때 큰 용기를 주었다.
사진 2: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2-3년 정도 많았을 때의 사진
은퇴를 하고 나니, 사회의 기대가 달라지고, 직장에서의 규칙을 지킬 필요도 없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도 덜 쓰게 된다. 마치 은퇴 전과는 다른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온 것 같다. 예전처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새로운 삶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떨 때는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과감하게 시도하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마치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 (사진 3)가 자주 인용한 말대로 살아가는 듯하다. ‘Do what you feel in your heart to be right- for you'll be criticized anyway. You'll be damned if you do, and damned if you don't.’ (‘마음속에서 옳다고 느끼는 일을 하라. 어차피 비판받을 것이니까. 해도 비난받고, 하지 않아도 비난받을 것이다.) 이제는 빈 도화지에 보이지 않는 선이 거의 없어져서 처음부터 자유롭게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게 된 느낌이다. 더 이상 사회의 기대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고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나의 원한대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사진 3: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의 초상화 (https://picryl.com/media/eleanor-roosevelt-portrait-1933-7437e7 무료이미지)
나에게 은퇴는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찾는 여행이고, 나를 구속하던 보이지 않는 선의 밖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3년 정도 은퇴 생활을 하면서 배운 몇 가지가 있다.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생각을 확인해 보시면 좋을 듯하다.
절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이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엔 너무 늦었지…’, ‘이 나이에 운동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지…’ 은퇴하면 적지 않게 듣는 말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루가 더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려고 한다. 한 예로, 먹어 보기만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렵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본 적은 없으나 만들어 보고 싶었던 프랑스 요리 (사진 4), 이제는 레시피를 보고 시도하고 있다. 꽤 맛있게 만들어진다. 다른 한 예로, 머릿속으로는 지우고 또 쓰고 했던 가족 소설이나 탐정 소설을 곧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No limits. Keep going!
사진 4: 처음 만들어 본 프랑스 요리: 라따뚜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는 하되 따르지 않는다.
은퇴를 하니 자식들이나 주변 친구들이 대학이라는 보호된 환경에서만 있던 나를 걱정하여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영양제는 먹고 저 영양제는 먹어도 소용없다고 한다. 사기꾼이 너무 많으니 모르는 사람은 사귀지 말라고도 한다. 나를 위한 말들이기 때문에 잘 듣기는 하되, 대부분 따르지는 않는다. 그들이 내 삶을 살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뭐 어때,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해 보고 있다. 은퇴자만의 호사일 것이다 ## 국가의 중책을 맡은 분들은 절대 이러면 안되겠죠...(사진 5) No regrets yet.
사진 5: 당당히 F 학점도 맞을 수 있는 기분이 든다.ㅎㅎ (https://openclipart.org/detail/322760/kid-with-an-f 무료 이미지)
죄책감을 버린다.
매일 바쁘게 살던 사람들이 은퇴 후 출근할 필요도, 주어진 일을 할 필요도 없어지면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내 경우, 그러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다. 책을 쓰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살아온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며칠을 허비하던 일을 절대 하지 못하였는데, 요새는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기 시작하고 있다. 내 전공이 아닌 일반적인 영역에서 지금과 같은 블로그를 쓰는 데 시간을 써도 죄책감이 없이 오히려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Shake off the guilt, live 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