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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Nov 11. 2021

글쓰기의 최전선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십일월이었다. 가장 잔혹한 달은 사월이라던데, 봄의 초입이 한참 지난 가을에서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반듯이 걷고 있어, 라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보지만 사실 부족한 자기 위안이란 걸 알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는 건 애초에 명확했고, 그건 작년 삼월에 귀국한 이후 기정사실이 된 터였다. 삶의 어느 한순간에서 오늘을 기억했을 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그만 성과들을 거머쥔 나는 나태한 육체에 기대어 목적의식 잃은 인형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한 채 일 년이 흘렀다.


예전에 책을 두 권 냈어요. 한 권은 한국, 다른 한 권은 프라하의 공간들을 다룬 책이죠. 일상에 수렴하는 이상적인 풍경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제가 제일 사랑했던 공간들을 공개하는 건 아쉽지만,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따위의 자기소개를 생각했다. 현재는 아시아의 정치 폭력과 시위를 분석하고 있어요.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시위 주체자들을 담담한 숫자로 풀어내고 있죠. 형용사와 부사로 세상을 보다가 명사와 동사로 세상을 보는 것만 같아요, 라고 소개를 건넬까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소개로도 나의 글쓰기를 묘사해낼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써 왔는가.


되돌아보건대 글은 내게 사치재였다. 나 자신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 썼던 글들은 모두 어느 깊숙한 노트들에 처박혀 있었고, 내가 지면에 낸 글이라곤 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글들뿐이었다. 나는 한국의 골목을 묘사하며 관심도 없었던 후줄근한 골목 안의 삶을 들추어냈고, 한적한 지방 도시의 미술관을 홍보하며 있지도 않은 예술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내가 써왔던 글은 결국 팔리기 위한 글, 아무리 나의 삶이 깃들어 있더라도 결국 누군가의 사치를 위한 소비재에 불과했다.


최근의 나는 나 자신도 감응할 수 없는 글들을 써냈다. 지난 이 년 동안 내가 쓴 글들은 감정이 없는 사실 적시에 불과했다. 이번 주의 태국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위대와 왕정을 등에 업은 공권력의 충돌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최소한의 직유와 사실에 기반한 서술은 시위대의 발걸음에 공감하고자 하는 조그만 욕구마저 앗아갔다. 내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시위대의 슬픔도, 그들이 염원했던 민주주의도, 그 목소리들 사이에서 빼앗겨진 생명에 대한 추모도 아니었다. 그저 시위와 진압, 그리고 죽음의 삼박자만이 내 활자들을 잠식했다.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은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첫 챕터부터 나는 침묵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책을 펼쳤다. 그는 내게 삶의 옹호로서, 감응하는 신체의 소산으로서, 사유의 결과물로서 쓰인 글들을 내어줬다. 그가 선정한 책 제목만큼이나 최전선에서 삶과 사회를 직시하는 듯한 글들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글들을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읽었다. 그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위안을 얻으며, 조금은 그가 왜 글을 쓰는지 알 거 같기도 했다.


나는, 왜 쓰는가. 사실 중요한 건 내가 여태껏 무슨 글을 써왔는지가 아니었다. 나는 왜 쓰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싶은가. 중요한 건 지난 세월을 살아온 총체의 나로서 내가 무엇을 쓸 것인가였다. 책을 덮으며 오랜만에 자판 앞에 앉았다. 부끄러운 감정들을 활자들에 기대어 조금씩 털어냈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라고 말했던 그의 말마따나, 가장 나다운 글을 쓰고 싶었다. 다시 한번 글을 통해 여태껏 만난 세상과, 길 위의 인연들과, 불현듯 느꼈던 온도의 변화와,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감정들을 풀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싶었다.


그래,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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