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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to erase Mar 22. 2017

Ways of Seeing - 존 버거

책을 읽고,

<Ways of Seeing> 존 버거   

(책을 읽고, 리뷰)


언어와 시각에 대한 관계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시작하면서 존버거는 보는 행위와 언어의 관계, 보는것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면서 보는 행위가 아주 근본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속성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말, 즉 언어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었다. 사람에게 있어 본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보고, 본것을 학습하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말을 하게되고, 읽고 쓰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보는 것과 아는것(언어, 지식)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은 기존 전통적 보는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다른 방식의 보는 시각이 있음을 제안한다.


책의 표지에서 보여주고 있는 마그리트의 <꿈의 열쇠>라는 그림에서 이미지와 글은 서로 맞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믿고(알고) 있는 것"에 연관된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일종의 “선택행위"로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시각의 상호관계성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우리의 눈은 오로지 그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주변의 모습도 함께 보게된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생각한다. 보고있는 물건과 나와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준다.” 본다는 것은 일방적인 행위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일방적이지 않다. 내가 누군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도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무언가를 보는 순간, 그것은 동시에 나 또한 보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각의 상호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인것이다.


이미지

그림이나, 사진 등 이미지라는 것은 늘 우리가 본것을 “재창조”하였거나 “재생산”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이렇게 생산된 이미지들도 우리의 (보는 방식에 의한) 선택에 의해 생산된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찍은/그린 사람의 무수히 많은 시각속에서 특별히 선택된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작자의 보는 방식에 따라서 이미지의 주제 선택이 결정된다.


원근법

우리는 흔히 원근법에 맞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그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고 느낀다. 원근법의 관습은 모든것이 관찰자의 눈에 집중된 것으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다. 우주가 신을 위해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듯이, 가시적 세계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정돈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근법의 내적 모순은 신과는 달리 한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카메라

카메라의 등장으로 모든것이 인간의 눈으로 한데 모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원근법을 사용하는 모든 소묘와 회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메라, 특히 영화카메라는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림의 독자성과 원작의 의미

모든 그림의 독자성은 그림이 걸려있던 장소가 지닌 독자성의 한 부분이었다. 복제가 아닌 원작이 독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 즉, 희소성에 따라 정의된다.


이미지의 의미와 가치는 그 작품의 실제 의미와 관계없이 다른 외부요소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 그것의 시장가치가 그 작품의 가치를 높여준다거나 낮출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이미지를 어떤식으로 변화시키는지 정확하게 설명 힘들지만, 어쨌든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미지옆에 어떠한 글을 써넣으면 이미지는 그 문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동굴속성모>, 그것은 진품이며 그래서 아름답다. 내셔널갤러리의 카달로그에서 <동굴속의성모>에 관한 설명이 가장 길다. 그 설명은 ‘작품의 이미지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그 그림을 누가 그리도록 주문했고, 그림을 둘러싼 법적인 분쟁이 무엇이며, 누가 그 그림을 소유했는지, 그 시기는 대략 어떻게 되는지…… 등등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이 그림이 진짜 작품임을 증명하기위해 조사로 얻어진 것이다. 즉, 다른 곳의 작품이 복제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큰 공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복제 기술과 예술의 의미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 부터 떼어낸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전통회화에서의 남자와 여자

남자의 사회적 존재는,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능력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표지로 읽을 수 있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전통회화에서 그려진 수 많은 여성의 모습(누드화)은  그것을 보는 —그 그림을 소유한— 남자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전통회화에서 거울은 종종 여자의 허영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이용된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그림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위선적이다. 거울은 무엇보다도 여자가 스스로를 하나의 구경거리로 대하는 데 동의하는 것 처럼 만들어준다.


누드와 벌거벗은몸의 차이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라는 책에서 "벌거벗은몸은 그저 옷을 입지 않고 있는 상태이지만 누드는 예술의 한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누드는 회화가 이룬 하나의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이다.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위해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복장의 한 형식.


광고이미지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제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란 결코 쾌락 자체를 찬양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가 스스로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즉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매력적인 인물들의 힘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행복 속에 있다.


광고와 유화의 관계

광고는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한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로,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소유한 것들이 곧 나 자신 원리에서 나온 미술 형식이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유화는 현재시제로 그려져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광고는 미래시제로 이야기 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왜 광고가 그럴듯해 보이는 지 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두간극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생생한 경험에 의해서 다리가 놓여져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은 매혹적인 백일몽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정리하며

존 버거외 4명이 공동으로 만든 이 책은 7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는 방식이 아닌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관하도록 만들어 졌다. 그 중 세개의 에세이는 글이 없는 이미지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앞부분은 언어와 시각의 관계와 보는 행위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였고 중간 에세이에서는 전통회화에서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누드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뒷 부분에는 상업 광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유화와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욕구와 광고이미지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4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은 현재 읽기에 조금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여 본다면 상당히 독특한 시각으로 쓰여진것 같다. 특히 전통회화를 해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그 회화를 보는 방식(인식하는 방식)이 실제로는 시각적 의미 보다는 그 뒷 배경에 "조사"된 정보에 큰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기호 = 기표 + 기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여러가지 요소가 관련이 있겠지만 우리가 보는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 우리가 욕망하는것, 사회적관계와 인식에 의해 상당히 다르게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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