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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PKU Jan 28. 2024

한가하기 좋은 시간

잠시 한 템포 쉬어가는 시간, 오후 세 시 무렵

ⓒTim Gouw


타다다... 다다닥. 키보드 위에서 춤추던 손가락이 느려진다.


눈꺼풀은 졸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끔벅끔벅한다. 누가 봐도 졸고 있는 모양새다. 파티션 너머로 누가 볼까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가며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이럴 때가 아니다. 퇴근 전에 결재받으려면 속도를 내야 한다. 서둘러 손을 마우스로 옮겨 타닥거리지만, 정작 마우스 커서는 카톡 창을 향했다. 어느새 회사 단톡방은 아래로 밀려있고 친구들의 대화가 몰려왔다. 하나같이 졸린다며, 일하기 싫다는 소리다. 나도 그렇다며 다크써클을 한 이모티콘을 보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조금 안 됐다. 퇴근의 설렘을 느끼기엔 아직 이르다. 서랍에 쟁여 둔 촉촉한 초콜릿 과자를 한입 물고 이어폰을 장착했다. 최대한 집중해 보겠다는 의지다. 비장한 각오로 일을 이어서 해본다. 타다다다탁! 한참 제안서를 쓰고 나서 시계를 다시 봤다. 겨우 10분이 지났다.


이번엔 핸드폰을 들고 친구를 찾았다. 웬일인지 이모티콘을 보낸 이후로 답이 없다. 아무래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으샤! 괜히 어깨를 한번 돌리며 텀블러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점심을 먹은 후 첫 기립이다. 참았던 커피를 마실 생각으로 직원휴게실을 찾았다. 못 보던 차가 있어 커피 대신 따뜻한 물을 채웠다. 티백을 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사는 동네와 가까워 집으로 가는 이정표와 같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면 롯데월드타워를 둘러싼 구름이 내게 빨리 집으로 오라고 둥실거린다.


지하철 2호선이라도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 텅 빈 2호선을 타는 행운이 생긴다면 잠실역을 그대로 지나쳐 한강 다리 위를 달리는 순간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 지하철 창문을 프레임 삼아 근사한 한강 사진을 건질 수 있을 텐데. 서울숲이든 홍대든, 어느 곳에서 친구를 만나 조각 케이크를 하나 두고 수다의 향연을 펼치고 싶다. 아니면 TV를 보다 잠든 엄마의 등에 기대어 함께 잠들어도 좋겠다. 그러려면 부산집까지 가야 하니 그냥 자취방에서 지난밤에 보다가 만 영화를 끝까지 봐야겠다. 평일 낮에 이런 자유를 누리려면 아무래도 로또가 답이겠지. 나른한 상상을 하는 사이에 차는 잘 우러나 복숭아 향이 가득 찼고 사무실에서는 나를 찾는다.

어떤 날에는 옆 부서 과장님에게 신호를 보낸다. 사내에도 커피머신이 있지만, 우리는 1+1 쿠폰을 핑계로 카페를 향한다. 잠시 사무실에서 탈출해서 맛보는 자유는 직장생활의 숨구멍이 된다. 시작은 업무 이야기지만, 자연스럽게 잡담으로 이어진다. 내가 추천한 영화<더 웨일>을 과장님도 주말에 봤다고 했다. 그녀의 영화리뷰는 기가 막힌다. 우리는 영화 속 대사 ‘disgusting’을 이야기하다 죽음까지 논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디스커스팅한 내 모습을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주인공은 죽음을 앞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음 글감으로 괜찮겠다 싶어 얼른 메모장 앱에 기록했다. 때로는 쓸데없는 수다가 새로운 영감이 되기도 한다. <더 웨일>에서 메멘토 모리로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부장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쉽지만 3시의 방에서 나와야 한다.


3시의 방/53.0x45.5cm/oil on canvas/2019, 김유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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