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2024) 리뷰
* <조커: 폴리 아 되>(2024)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거울은 나를 속였다. 진정한 거울은 나와 함께 이 트렁크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다. 아니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거울은 없다.
<거울에 대한 명상>, 김영하
On the day that you were born the angels got together
(당신이 태어난 날, 천사들이 모였어요.)
And decided to create a dream come true
(그리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로 했지요.)
<(They Long To Be) Close To You>, Carpenters
1970년 8월 19일에 발매된 미국의 혼성 듀오 카펜터스의 두 번째 스튜디오 음반은 <Close To You>는 발매 이후 그들의 대표적인 앨범으로 자리 잡았다. 앨범 내 동명의 곡인 <(They Long To Be) Close To You>는 아련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부드럽고 듣기 편한 이들의 앨범 내 곡들은, 그러나 약물 중독과 거식증, 언론 및 타 뮤지션들의 견제와 공격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들의 과거를 떠올리면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사에서, 화자는 ‘그들’처럼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천사들이 꿈을 현실로 만들고, 나는 끝없이 당신에게로 향한다.
<조커: 폴리 아 되>(2024)가 카펜터스의 곡을 오리지널 스코어로 차용한 것은 단순히 고전 팝이 주는 아련함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중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에게 접근한 리 퀸젤(레이디 가가)은 <Close To You>를 부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아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세계를 감각한다. 그 세계에서 아서는 조커가 되고, 리는 할리퀸으로 등장한다. 웃음과 농담, 춤과 노래, 살인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무대는 담배 연기처럼 자유롭고 순간적이며 중독적이다. 그런 점에서, 리는 아서에게 있어 담배와 같고, 그들은 아서가 지난한 현실을 벗어나 상상계로 진입하는 티켓이다. 상상 속에서 그의 농담은 연인을 웃게 한다. 그의 춤은 연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리듬과 뒤섞인다.
리가 아서의 상상계로 진입하는 티켓이라면, 아서는 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환상으로 향하는 티켓이다. 그녀가 처음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그녀가 TV에서 머레이를 쏴 죽이는 아서를 보았을 때다. 그녀 내부에서 태동한 감정의 일방성은, 아서라는 실재 위에 그녀가 감각한 환상을 덧씌운다. 리의 세계 아래 아서라는 존재는 조커라는 개념으로 관념화된다. 그리고, 이는 그녀만의 관념이 아니다. TV를 통해 중계된 그의 모습은 모든 수용자에게 각각의 조커로서 환원된다.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아서의 주체적 주도권은 상실된다. 리가 여타 수용자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실제로 아서를 마주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가 투사하는 관념의 영향은 보다 강력하다. 그녀와 그의 뮤지컬은 아서의 상상과 리의 환상이 부딪히는 하나의 거대한 몽상이다. 서로가 함께 꾸는 꿈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우며, 그렇기에 아름답고 필연적인 비극에 다다른다. 장자와 나비는 결국 서로의 현실로 돌아갈 운명이다.
아서는 꿈에서 깬다. 그는 자신이 조커가 아님을 시인하고, 법정은 그런 그를 재판한다. 법정 내부에 자리한 배심원들은 다양하다. 그에게 가족과 친구를 잃은 유족들과 정의를 추구하는 시민들. 조커의 광기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 그러나, 아서의 재판에는 하나의 배심원이 더 있다. 바로, 그의 모습을 비추는 TV다. TV 너머에는 그의 복제를 수용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 그들은 스크린을 투과한 시뮬라크르를 조커라는 환상으로 재생산한다. 법의 테두리(법정) 밖에 자리한 이들이 내리는 선고는, 법정 내의 배심원들의 판결과는 상이하다. 법으로 이루어지는 판결에 대해, 그들은 테러로 답한다. 법은 아서 플렉에게 유죄를 내리고, 테러리스트들은 조커에게 무죄와 자유를 선고한다.
자유가 된 조커의 비행은, 그러나 끝내 예정된 추락을 맞이한다. 그가 법정에서 조커의 죽음을 공언하는 순간, 리의 세계를 이루던 환상은 무참이 깨져버린다. 무너진 세계에서 더 이상 꿈은 공유될 수 없다. 조커가 되어 내려온 계단에서, 리는 계단을 오르며 아서를 떠난다. 산을 쌓아 올리고자 했던 그녀는 계단을 올라 꼭대기를 향한다. 그리고, 몽상과 상상을 상실한 아서에게는 추락이 남는다. 경찰이 계단 아래서 그를 기다린다. 그는 계단을 내려간다.
아서의 상상과 리의 환상이라는, 그리고 그들의 한때의 몽상이라는 조커는 사라졌다. 그러나, 조커의 죽음은 불완전하다. TV 속 모니터를 통해 확산된 조커의 잔재들은 여전히 무수한 대중들의 환상으로 기능한다. 수용소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단도로 아서를 살해한다. 그의 농담은 ‘광대를 살해하는’ 내용이다. 환상은 시뮬라크르를 살해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다. 살인에 성공한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입을 찢는다. 그는 스스로 환상이 되고, 조커는 여전히 수많은 존재들을 숙주로 삼은 채 관념으로 생을 유지한다. 그리고, 아서는 끝내 죽음에 이른다. 환상을 겨냥한 욕망이라는 칼날은 부조리한 현실과 나약한 존재의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폐부를 찌른다. 실재는 없다. 존재는 떠다닌다. 세계는 애니메이션과 같고, 오프닝의 만화는<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의 오프닝 씬처럼 그 자체로 부조리함을 선언한다.
<조커>(2019)의 성공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편의 엄청난 흥행과 관심에는, 조커라는 광기 자체에 대한 매력과 자극이 있었다. 당시 상영 직후 미국 내에서는 모방 범죄 우려가 대두되었다. 일본에서도 조커 분장을 한 범죄 행각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5년. 대중들은 여전히 광기 어린 조커를 기대하고 열광한다. 아서 플렉의 재판 밖에 자리한 배심원은, 어쩌면 TV 시청자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재판장에 자리한 또 하나의 매개체는 바로 이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린이다. 그리고, 관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피고 아서 플렉에 대한 또 하나의 배심원들이다. 속편 개봉 이후, 극과 극으로 갈린 평가는 그러한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현실계에 존재하는 아서 플렉은 이 영화 자체와 같다. 조커라는 거대한 예술적 상상과 폭발적인 환상의 틈에서, 속편은 묵묵히 마르고 쇠약한 수용수의 길을 걷는다.
아서 플렉은 쓰러진다. 그는 사이코패스에게, 조커를 찬양하는 대중들에게, 조커라는 환상에 의해 살해당한다. 복부에 피가 배어 나오고, 비틀대다 바닥에 널브러지는 그의 몸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진다. 상상과 환상의 세계 속에서, 피는 ‘아서 플렉’이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리고, 삶을 증명하는 붉은 피는, 동시에 그의 죽음을 공언한다. 피는 그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를 밝혀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칼을 쥔 조커라는 ‘관념’이었다. 부재가 실재를 증명하고, 실재는 부재한 채 관념으로 편입된다. 영화의 이 숨 막히는 부조리는, 노쇠한 아서의 육신과 맞물리며 처연하게 흐드러진다. 삶은 무엇인가. 존재는 왜 이토록 고통받으며, 허상과 관념들, 부조리한 이미지들은 어째서 실재를 교란하는가. 어쩌면, 이는 환상을 가장 집요하게 좇는 예술가라는 이들이 느끼는 허무와 공허에 관한 단상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담배 연기와 같다. 그리고, 예술은 담배를 태우며 흩어지는 연기를 감각하는 일이다.
영화의 막이 내린다. 크레디트가 오르고, 조명이 켜진다. 환상으로 떠난 이들은 현실로 돌아오고, 검은 화면에는 세계의 편린으로서 음악만이 흐른다. 카펜터스의 천사들은 여전히 꿈을 현실로 만들고, 공허한 현실은 머나먼 꿈을 부지런히 좇는다. 흐르는 음악에 발맞춰 조커가 춤을 춘다. 발길질을 해대고, 연인에게 총을 맞는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흐르고, 영화는 극장 밖을 나서는 관객에게 가만히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자 이곳을 찾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