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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l 14. 2024

완벽한 날들

<퍼펙트 데이즈>(2024) 리뷰

*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광주를 찾았다. 1시쯤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문화전당역에서 하차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들어서자 외벽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에서 아랍 문화 관련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날은 비가 올 듯 흐렸고, 우산을 같이 쓴 연인들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연극 공연까지 시간이 잠시 남아, 시설 내 도서관에서 잠시 머물렀다. 재미있는 게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도중, 역사 코너에서 아리프 딜릭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이란 책을 집었다. 탈식민화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며, 역사 자체의 부정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흥미로웠다. 1장을 다 읽을 때쯤 시계는 2시가 임박했음을 알렸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마저 읽기로 하며 책을 제자리에 두고 예술극장으로 향했다.

공연 제목은 <대리된 존엄>이었다. 미래 사회, 인공자궁과 대리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은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인식적 세계, 연극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대학 시절, 소극장 공연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예술적 담론을 진지하게 녹여낸 연극은 처음이었다. 극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거의 만석이었고, 나는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의 열기를 느끼며 묘한 흥분을 느꼈다. 연극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사람들과 함께 밖을 나서며 나는 쉽사리 감정을 달래지 못했다. 잔뜩 신이 난 채, 근처 햄버거집에서 간단히 허기를 달랜 후 시내 외진 골목에 위치한 한 독립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점 내부는 아늑했고, 전에 가수 김사월 씨가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커피와 차 외에도 칵테일과 위스키 등 주류를 판매한다는 걸 알고, 오미자 하이볼을 한 잔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벽면에 진열된 책을 구경하던 도중, 사장님의 추천을 받고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와 구자혜 작가의 희곡집 <로드킬 인 더 씨어터>를 구매했다. 자리에 앉아 방금 전 연극에 대한 소회를 글로 풀어낸 후, 적당한 취기를 느끼며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를 조금 읽다가 어둑해진 밤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구름 잔뜩 낀 하늘에서 비는 끝내 내리지 않았고, 집 가는 길에 위치한 동명동은 늘어선 술집을 따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걷는 그들 사이로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나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달은 반이 채 차지 않았으며, 촉촉한 비 냄새가 가끔씩 코끝에 스미는 듯했다.

다음 날 오전, 차를 몰아 상무지구로 향했다. 영화관 근처 카페에서 산미가 깃든 커피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시간이 되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감상한 영화는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2024). 작중 주인공 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는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영화 내용은 별게 없다. 한 노년의 남성이 도쿄 환경미화원 일을 하며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간다. 날은 밝았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하고, 가끔 사람들이 말을 걸고 찾아왔다가 떠나간다. 도쿄 타워는 밤이 되면 늘 현란한 조명을 뽐내며, 단골 가게의 술은 언제나 맛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하루는 대체로 비슷하다. 이웃의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며, 미화원복을 챙겨 입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차에 올라탄다. 도쿄 화장실 개수는 정해져 있고, 가끔 시민이 화장실을 이용하기라도 하면 밖에서 기다리며 선연한 햇살 아래 너울지는 잎들을 바라본다. 같이 일하는 어린 사내 타카시(에모토 토키오)는 말이 많고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지만, 히라야마는 과묵하다. 영화 시작 후 한참이 지나서야 첫 마디를 내뱉는 그의 대사량이 급격히 늘어날 때는, 반복되는 일상에 뜻밖의 비일상이 틈입하는 경우다. 타카시의 애인인 아야(야마다 아오이)가 그의 카세트테이프에 흥미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할 때, 히라야마의 조카인 니코(나카노 아리사)가 불쑥 찾아올 때. 대사량의 절정은 그가 자주 가는 선술집 주인의 전 남편인 토모야마(미우라 토모카즈)와 마주할 때다. 그들은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짙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가 하면 그림자밟기 놀이에 열중한다.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히라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역시, 타인이 히라야마의 하루에 영향을 미칠 때다. 아야가 히라야마의 볼에 키스를 할 때, 그의 동생이자 니코의 엄마인 케이코(이소 유미)와 재회할 때. 그리고, 토모야마와 그림자를 겹치며 짙어지는지 확인할 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토모야마의 말에, 히라야마는 거칠게 내뱉는다. ‘변한 게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조카인 니코가 케이코와의 관계에 대해 물을 때, 히라야마는 이렇게 답한다. ‘모두는 각자의 세상이 있는 법이야.’ 인간의 삶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각자는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한계를 지닌다. 아무리 사랑하고 원해도 둘은 하나가 될 수 없기에,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히라야마는 혼자다. 그는 혼자 묵묵히 도쿄 내 화장실을 청소하고, 혼자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카세트테이프를 듣는다. 혼자 책을 읽고 잠이 들며, 홀로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난다. 가끔 그의 시선에 맺히는 노숙인의 혼곤한 춤사위는 마치 바람결을 따라 움직이는 나뭇잎을 닮았다. 자연은 그 자리에서 나풀거린다. 그의 삶은 자연과 같다. 홀로 벌이는 외롭고 평화로운 춤사위. 그는 외로우며, 그러므로 평화롭다.

그의 안정이 깨지는 지점은, 그의 삶에 타인의 세계가 끼어들 때다. 돈을 빌린 타카시 탓에 히라야마는 저녁마다 가는 식당을 그냥 지나친다. 홀로 듣던 카세트테이프를 아야와 함께 들을 때, 그리고 아야가 볼 키스를 건넬 때 그의 얼굴은 붉어지며 동공이 떨린다. 니코와 함께 화장실을 돌아다니고 밥을 먹으며 자전거를 탈 때, 그는 행복을 느낀다. 동생에게 조카를 보내며 포옹할 때 그는 눈물을 흘린다. 선술집 주인의 전 남편을 만나 그림자밟기 놀이를 할 때 그는 기쁘면서 동시에 슬퍼한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의 하루는 어떤 기쁨으로 채워져 있나요?‘ 이 질문은 조금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의 하루는 어떤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나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기쁨과 슬픔은 상반되지 않는다. 각자의 견고한 세계에 타인의 세계가 틈입할 때, 잔잔한 감정은 극도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기쁨과 슬픔의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겹쳐져 짙어지는 세계의 뒤섞임 속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세계는 끝내 이별할 운명이기에, 다시 홀로 남은 세계에서 우리는 외로운 평화를 느낀다. 기쁨과 슬픔의 반의어는 외로움이며, 또한 평화다. 일상은 평화로운 외로움의 연속이고, 그러한 일상이 타인이라는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지는 순간 비일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비일상은 한시적이다. 하루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홀로 남은 일상이며, 우리는 그렇기에 다시 혼자가 된다. 물론, 날은 머지않아 다시 밝을 것이다. 잠에서 깬 히라야마는 차를 몰아 일터로 향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린다. 그는 울며 웃는다. 그는 슬프며 기쁘다. 그의 일상에는 여전히 비일상의 잔향이 남아있다. 히라야마의 하루를 채운 기쁨과 슬픔은 타인들이다. 타카시와 아야, 니코와 케이코, 그리고 토모야마. 그의 감정을 카세트테이프 속 밴 모리슨이 담담히 위무한다.

영화 감상 후, 차를 몰아 여수로 향했다. 어느덧 밖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와이퍼를 움직여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를 부지런히 쓸어냈다. 고요한 차에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고, 카세트테이프가 없는 나는 차내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어 빌리 조엘의 <Piano Man>을 재생했다. 컵에 물방울이 맺힌 커피가 있는 카페에서, 가지런히 책이 놓여있던 서점과 멋진 연극이 상연된 극장에서 나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 물론,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이들이지만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배우들과 책을 추천해 주신 사장님, 친절하게 커피를 내주신 카페 주인분은 일상에 작은 감정들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잠시 겹쳐진 세계가 다시 홀로 남게 된 차 안에서 컨트리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집에 도착하면 LP를 틀어놓고 실비아 플라스의 책을 마저 읽겠지. 반복되는 일상은 편안하고 또한 외롭다. 나의 하루는 어떤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을까. 결국 타인의 세계가 나를 대리할 수는 없기에, 본질적인 외로움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잠시 찾아드는 감정의 잔향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아마 그런 게 아닐까. 겹쳐진 그림자가 짙어지는지 확인하려면, 겹쳐보는 수밖에 없지. 나는 내 위에 잠시 머무를 그림자를 기다리며 물끄러미 빛을 바라본다.



<퍼펙트 데이즈>(2024), 출처 :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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