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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ul 14. 2024

대리된 존엄

2024,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

프로젝트 수업의 일환으로 ‘공익광고 만들기’ 활동을 진행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둠별로 직접 시나리오와 대본, 촬영 및 편집을 통해 ‘배려’와 ‘협동’에 관한 1분 내외의 광고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수준에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수업 시간에 교실 밖을 나선다는 해방감은 아이들로 하여금 과제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지게끔 하였다. 운동장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아이들을 보조하러 밖을 나서니, 해맑은 웃음의 소유자인 한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왜 우니? 놀라서 물어보니, 축구공을 맞는 연기를 하던 도중, 실제로 공을 맞으니 문득 서러워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실제와 연기를 헷갈린 이 귀여운 슬픔에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달래고, 공을 조금 덜 세게 차라는 조언을 건네며 다시금 신나게 영상을 찍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연기는 비단 아이들만의 과제는 아니다. 나 역시 학급에 들어서기 전, 얼마간의 마음의 준비를 한다. 수십 명에게 보여지는 직업인 교사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자 영향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생활 자세에 대해 단호하게 지도하거나 혼을 낼 때, 긴장이 풀린 채 헛웃음을 짓게 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마주함에 있어 나는 항상 어느 정도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몇 시간 내내 힘을 주다 보니,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온몸에 힘이 쫙 풀린 채 교탁에 널브러지게 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쑥불쑥 교실을 찾는 아이들이 있기에 지속할 수 없다. 고된 촬영과 연기는 오후 내내 이어지고, 퇴근 후 집에 와 배역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한숨을 돌리곤 한다.

군 복무 당시, 개인정비 시간에 휴대폰으로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2012)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드니 라방은 자동차를 타고 곳곳을 배회하며 저마다의 삶을 연기한다. 그는 때로 걸인이 되고, 모션 캡처 배우가 되기도 하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총 9편의 삶에서 그는 각기 다른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하며, 연기 후 차에 올라타는 그의 얼굴에는 피로로 인한 주름이 깊게 패어 있다. 영화를 보며, 나는 새삼 입고 있던 군복이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령받은 신규 교사였던 나는, 불과 몇 달 만에 초록 군복 위 일병 약장을 단 군인이 되어 있었다. 이름 앞에 계급을 붙여 말하는 관등성명은 어느샌가 자연스레 입에 붙었고, 나는 애초부터 군인인 듯 이 현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 뜻 모를 낯섦은 왠지 모르게 우습고 기묘했다. 마치 연기에 몰두한 배우가 연극이라는 현실을 관객의 위치에서 감각하듯, 나는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생활관 안에는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짧은 머리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내들이 있었다. 간부가 문을 열고 저녁 점호 관련 지시사항을 전파했다. 오늘 저녁 점호 간 특이사항 안내가 있으니 참고하도록. 말끝에 경례 구호를 붙이는 나의 손동작은 무의식중에 자연스러웠고, 그 후 의식적인 낯섦이 이어졌다.

‘인생은 무대 위의 한 편의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이 명언을 연극 <대리된 존엄>(2024,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SF 장르를 차용하여 풀어낸다. 인공자궁과 대리모가 성행하고, 출산이 구시대적 전유물로 여겨지는 사회 속 인물들은 삶의 주체성에 대해 자문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인간의 존엄성, 자본주의와 인류애적 가치, 언어 등 곳곳에 산재하는 관념적 세계가 인간 존재 각각에 하나의 세계를 덧씌운다. 연극은 개인의 선택에 대해 묻는다. 개인의 선택의 주체성은 어디까지 한정할 수 있는가. 대리모인 주인공은, 자신을 계몽하려는 기자에게 현재의 삶이 선택의 결과물이라 일갈한다. 이에 분노하여 반응하는 기자 역시 한정된 자신의 세계를 대리할 뿐이다. 연극의 말미에서 배우들은 배역을 벗고 하나둘 퇴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앨리스(홍수정)는 희망을 엿보았던 연극 속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유토피아는 여기가 아니었던가. 모두가 떠난 자리.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명에 의해 밝아진 실내 속 관객들을 감각한다. 한 인물의 세계가 빛에 의해 파괴되고, 연극은 비로소 막이 내린다.

스타니슬랍스키가 고안한 연기론인 ‘메소드 연기’는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이제는 제법 친숙한 단어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연기와 삶이 일체가 되어 몰두한 배우에게 열광한다. 실제와 허상의 모호성은, 그러나 연극이라는 합의된 질서를 벗어난 순간 혼란과 두려움을 야기한다. 현실이라 굳게 믿는 세계 역시 얼마간 연극적 허상을 대리하며, 우리가 믿는 주체성은 배우의 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치와 종교, 자본과 신념, 언어와 민족 등 내외적인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일정한 배역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배역이 주체적 삶과 합일되어 메소드 연기로 표현될 때, 그 감동만큼이나 파괴적 불안 역시 증폭된다. 극중 앨리스는 깨어진 세계를 바라보며 충격에 빠진다. 그녀를 보는 나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관객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현실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어쩌면 나도, 한 편의 연극 안에서 관객이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극은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 되고, 그녀는 나의 거울 자아로 자리하게 된다. 그녀의 몰락에서 나는 어떤 나르시시즘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대리된 존엄>이 세계의 파괴로 막을 내린다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나는 그 답의 흔적을 카락스와 드니 라방에게서 찾는다. 밤은 계속될 것이고, 자동차는 끝없이 주행을 이어갈 것이며 드니 라방은 다음 배역을 위해 대본을 읽을 것이다.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끝없이 오르내리는 시간의 질서 안에서, 현실과 주체성은 어떻게 감각될 수 있는가. 연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연극은 언젠가 막을 내리며, 다음 연극은 배우를 필요로 한다. 셰익스피어는 삶을 통찰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삶을 조금 다르게 정의 내리고 싶다. ‘인생은 무대 위의 일련의 연극이다.’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연기는 계속되고 삶은 이어지며, 인간은 존재하므로 의미 있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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