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 리뷰
불어닥치는 비바람을 헤치며 도착한 곳은 자주 들르는 레코드가게였다. 간만에 뵙는 사장님과 인사를 나눈 후, LP 코너를 두리번거리며 뭐 들어온 거 없나 눈으로 훑었다. 전에 입고되었다고 들었던 Cigarettes After Sex 앨범을 집어 드는 순간, 옆에 자리한 HONNE 4집이 눈에 들어왔다. 절판되었다고 들었는데, 새로 들어왔구나! 반가운 마음에 덥석 집어서 계산대에 올려놓으니, 거의 1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눈에 밟힌 앨범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사장님과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건네주신 비닐에 든 LP를 손에 든 채 다시 비바람을 헤치며 주차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한켠에 놓인 LP를 세어보니, 생각보다 개수가 제법 많다. 제대 후, 작년 가을부터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LP는 어느새 20장이 넘어간다. 왜 팔자에도 없는 LP를 기를 쓰고 모으기 시작했나 곰곰이 돌이켜보면, 군 시절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읽은 어느 문장에서 시작된 것 같다. 재즈 애호가인 하루키는 LP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들을 앨범을 세심히 고르고 판을 조심스레 집은 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늘이 판을 긁는 일련의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취미를 향유하는 것이 제한적이던 상황에서 나는 LP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었고, 제대 후 복직한 학교도 차츰 적응이 되어가던 어느 가을, 문득 되살아난 LP 생각에 별 고민 없이 턴테이블을 지르게 되었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HONNE 3집 하나로 수십 번을 돌려 듣던 처음을 생각하면, 책상에 놓인 다양한 종류의 LP를 고르고 판을 올려놓는 게 이제는 꽤나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당 4~5만 원을 상회하는 판들을 마구 구매하다 보면, 주변에서 LP를 수집하는 이유를 질문해오곤 한다. LP 특유의 감성, 판이 튀는 앤틱한 느낌, 하루키적인 총체적 만족감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좋아하는 앨범을 실물로 손에 쥘 때 느끼는 설렘인 것 같다. 스트리밍으로 너무나 손쉽게 들을 수 있는 흔한 음악들이지만, 앨범 커버와 빼곡히 적힌 가사집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판을 잡을 때면 순간은 흥분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럴 때면,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에서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 방 한켠에도 턴테이블이 자리한다. 작중 엘리베이터 걸인 프랜(셜리 매클레인)이 외도 상대인 쉘드레이크(프레디 맥머레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LP를 건네고, 주인공 버드(잭 레먼)가 잠에서 깨어난 프랜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에도 LP 판을 올린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한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권력과 외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들은, 사랑이란 결국 주체적 감정의 표현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버드는 상사인 쉘드레이크의 요구를 거절한 채 회사를 나가고, 소식을 들은 프랜은 쉘드레이크와의 관계를 끊은 채 버드에게 달려간다.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의 끝에는 서로가 존재한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한 순간, 아파트 문은 비로소 열리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 아늑한 방에는 음악이 흐른다. 바늘은 열심히 LP 판을 긁으며 그들의 사랑을 읽어낸다.
사랑할 때는 누구나 바보가 된다. 왠지 모르게 덤벙대고, 애써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엉뚱한 대사가 되어 입 밖으로 뱉게 된다. 아무리 기억을 훑고 이유를 찾아도, 문득 찾아온 이 묘한 감정의 잔향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사랑은 나도 모르게 느껴버리게 되는 감정이다. 아무리 이유를 찾고 머리로 이해하려 할수록 자꾸만 뚝딱이고 바보처럼 굴게 된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결실로 뒤바뀌는 순간은, 스스로 이를 사랑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사랑은 이해가 아닌 인정으로써 완성된다. 사랑은 빠져버리는 것이며, 그 안에는 어떠한 체계나 법칙도 들어서지 못한다.
모임이 끝나고, 구매한 LP들을 들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봉투 안에는 구매한 2장의 판과 함께, 인심 좋은 사장님이 챙겨주신 클래식 LP 한 장이 들어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른편에 있는 턴테이블에서는 HONNE의 <HEARTSONG>이 흘러나온다. 그들이 노래하는 사랑 역시 바보 같을 것이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당최 이해되지 않는, 그러나 그럼에도 느낄 수 있으며 공감하게 되는 이 묘한 감정은 삶의 곳곳에 들어와 있다. 방에 놓인 수많은 책과 LP, CD들, 아이패드 속의 무수한 사진들, 가족과 친구, 동료 선생님들과 학교 아이들, 인사를 건네는 이웃과 모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삶은 이해의 바깥에 있는 감정들의 춤사위이며, 어쩌면 나는 그렇기에 부지런히 LP를 모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