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를 접할 때는 산책 중이었다. 기사 헤드라인에 적힌 ‘한강’과 ‘노벨상‘은 기이할 만큼 낯설면서도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잠시의 시차를 둔 마음은 뒤늦게 벅차올랐고, 집으로 달려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 20대 초반 빠져 읽었던 <채식주의자>와 새벽녘 불침번 근무를 함께했던 <소년이 온다> 사이에는, 2년 전 겨울 의정부 영풍문고에서 데려온 작가의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숱한 작가의 책들 중 그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고 부드러운 그 한 글자의 제목에는, 그러나 설원에서 겨우내 제 몸을 가누는 순록과 같은 처연한 서늘함이 있었다. 전역날을 기다리며 여러 불안들을 애써 달래던 그 겨울, 나는 그 제목에 어렴풋이 비치는 내 모습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은 계절과 공간을 넘어 나로 하여금 그 책으로 다시 돌아가게끔 하였다. 나는 고민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탄생은 실재하는 순간이자, 그러나 존재의 기억 밖에 있는 추상적 세계다. 나의 존재는 탄생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서 기능하지만, 인식의 불가능성은 삶의 부조리함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삶의 왜 고통스러우며 상처와 폭력은 세계의 문법으로 육신에 새겨지는가.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고자 하는 존재의 지난한 노력은, 그러나 끝에 이르러 거대한 여백 속에 필연적인 길 잃음을 겪는다. 그러한 길 잃음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근원에서 기인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우연과 망각과 피로 직조된 탄생. 이 부조리한 삶에 태어나버린 존재는, 탄생과 동시에 돌아갈 집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간호사는 눈처럼 하얀 강보로 아이의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 강보는 아무리 푹신한들 지나온 자궁을 대리하지 못한다.(p16, <흰>(한강, 문학동네) 인용)
한강 작가의 <흰>은, 다다를 수 없는 삶과 기억의 근원을 향하는 치열한 길 잃음의 과정이다. 출생과 동시에 죽음에 이른 그녀의 언니와 출생과 함께 고통의 세계에 발 디딘 그녀. 같은 시작점을 공유한 존재의 연결을 통해, 그녀는 이제는 희어진 세계 아래 놓인 어둠을 파헤친다. 세상을 둘러싼 흰 것들. 배내옷과 달떡과 소금과 입김과 백목련과 눈. 지나고 바래져 희어진 인식과 기억의 존재들을 향해 그녀는 펜촉으로 상흔을 낸다. 벌어진 틈 사이로 어둠이 배어 나오고, 그 어둠의 조각들은 떠나온 세계를 선연히 밝힌다. 제 몸을 베고 찌르듯 고통스러운 몸부림 속에서 그녀는 근원을 공유한 죽음을 느끼고, 동시에 홀로 남겨진 삶을 가까스로 감각해낸다. 희어진 것들에 어둠을 새겨 넣는 일. 소음과 비명에 침묵을 덧입히는 일.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도시에서, 그녀는 비로소 귓가에 울리는 자그마한 속삭임을 듣는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소련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 역시 이러한 속삭임이 영화 내내 흐른다. 영화 제목의 등장 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회주의를 위시한 독재와 전쟁, 가난과 질병 등 숱한 고통의 역사를 지나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어머니와 아내, 주변인들이 살아내는 지난한 삶의 바깥에서 감독의 아버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거나 가만히 시를 읊조린다.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와 멀어진 아내, 전쟁으로 신음하는 세계와 강압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영화는 맹렬히 고통의 근원을 파고들어간다. 영화 말미에 여인은 아이를 갖자는 남편의 말에 숲을 돌아본다. 숲 너머로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나이 든 그녀는 노쇠한 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대밭을 건넌다. 그들을 바라보며 여인은 눈물을 쏟는다. 결국 그녀는 그를 낳는다. 거장은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시작을, 고통의 근원을 바라본다. 그 너머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있다. 괴로움으로 얼룩질 삶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그는 가까스로 이해하고 위로하려 시도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서글프다. 거울을 향한 시선의 여정은 끝내 되돌아온다. 잔뜩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진 채,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하고서.
태어나버린 이는 사멸된 자신의 근원을 어떻게 감각하는가. 소설가는 희어진 것들에서, 시작이 된 피와 어둠을 찾아낸다. 영화감독은 거울 너머 맺힌 자신과 세계에서 탄생의 결심과 눈물을 발견해낸다. 흰 눈으로 뒤덮인 설원 위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기억의 편린들이 무질서하게 흩뿌려져 있다. 뒤를 돌아보지 마. 이미 흘러버린 거야.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를 끝내 내버려 둘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결국 밖을 뛰쳐나가 눈밭 위에 제 몸을 던진다. 기억의 조각들이 연약한 몸 곳곳에 상처를 낸다. 군데군데 피가 배어 나오고, 그럴수록 그들은 격렬하게 몸을 뒤틀며 고통을 감각해낸다. 한겨울 냉기 서린 밤, 피를 쏟아내며 온몸으로 삶을 받아내는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처연하고 괴롭다. 그러나, 그럼에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 지극한 고통의 몸부림 곁에 서서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는 것. 스웨덴 한림원에서 작가의 이름 두 글자가 울린다. 축하와 환희, 감동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덤덤하다.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몸짓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는 중이며, 그 맹렬한 움직임은 흰 눈처럼 세상에 내려앉고 거울처럼 우리를 비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 나는 책을 가만히 덮는다. 위아래의 두꺼운 표지가 얇은 종이들을 이불처럼 포근히 감싸 안는다. 여전히 세상은 알 수 없고 존재의 실감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침을 지나 다다른 밤의 어둠 속에는, 흘려보낸 기억의 조각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그럼에도 살아가는 마음들을 어렴풋이 비춘다. 서로를 밝히고 감싸 안으며 함께 느끼고 나누는 존재들. 희어진 것들에 새겨진 존재의 어둠들이 이 밤을 밝게 수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