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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Mar 25. 2024

무입력과 무출력의 사건

김언, 모두가 움직인다


무더운 여름, 최근 밀려 있던 시집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곳에 가려는 마음을 꾹 참고 정신적 지구력을 기르자는 다짐으로 읽게 된 김언의 <모두가 움직인다>. 읽는 내내 너무 어려웠는데, 여차저차 서평까지 전부 읽게 되었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해서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매우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라고 한다면 첫 번째는 시집이 생각보다 두껍다는 것이고 글의 내용 자체가 문법적으로 안 맞거나 시어의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서평까지 이어지는 책을 끝까지 읽어낸다면 이 시집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도 이렇게 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금 반성해 본다.


시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머릿속은 언제라도 복잡하고 다단해서 그걸 부수려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부수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존재에 대해서, 존재라는 말 자체에 대한 무로 돌아간다는 점에 도달하고 그 과정과 결과 모두를 오롯이 응시한다. 언어라 일컫어지는 텍스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을 눈에 보이는 글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개구멍

당신에게 입이 제일 먼저 생긴 이유를 물었다.
어딘가가 뚫리면서 건물은 완성된다. 사람에게 들어가라고
개구멍을 파놓지는 않았다. 개가 파놓은 것도 아니다.
주둥이가 먼저 기어 나왔지만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개구멍 밖에는 야식집이 있고
도서관은 밤새 불을 켜두었다. 손가락은 점잖게
출입구를 가리치지만 나는 점잖게 이거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 시집을 읽으면서 <사건>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더불어 결과와 시발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생각>을 하는 것이 다소 추상적이라 한다면 그것도 김언을 잘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을 글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고 추상과 실재의 간극을 좁히는 과정을 겪는 것이 이 시를 잘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독자는 이 구체적인 대상을 읽으면서 추상적인 것들을 느껴야 한다. 반복의 반복이다. 매번 이런 걸 보면 정반합이라는 철학적인 개념이나 니체의 니힐리즘 같은 것들을 떠올리리며 생각의 근본에 대해 면밀히 살피게 된다.


우리의 사상을 개념을 또는 생각이라는 것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책의 서평을 읽으면서 (이것마저도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텍스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존재와 발생 그리고 발상과 개념 같은 것들. 역시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의 과정을 고통이라 하여도 즐길 수밖에 없는 건 독서의 매력이다.


뒷부분을 읽으면서 주목했던 건 <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돌이라는 것이 되고 싶은 건 정말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일까? 또는 돌의 특성 중 무거움을 따라 떠오르는 것들을 누르고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까.


만약 내가 여러 자연물 중에서 무엇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자라나는 나무, 계속해서 생장하며 동시에 죽은 나무에 도달한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겨울을 지나 봄이 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할 때, 또는 봄이 다 지나더라도 그래서 때늦은 노력을 한대도 그 모든 과정들이 의미 있을 것이다.


또 수록된 시 중에서 뿌리로 내려가기 위해 저 밑까지 내려가야 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매번 이렇게 글을 길게 쓸 때마다 -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떠오른다 등의 서술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단언하는 문장을 만드는 만큼 나에게 자기 확인이 없어서일까, 라고 또 생각을 하게 되는 도돌이표가 되고 말았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나는 항상 시도한다. 나는 항상 물거품이다. 나는 항상 신비하고 절망한다. 나는 항상 이유다. 나는 항상 결론이고 거의 없다. 나는 항상 무한하고 있다. 나는 항상 결정적이고 온다. 멀어져가는 대상에 대하여 나는 항상 단정하고 대상이다. 나는 항상 불가능하고 없다. 홀로 던져져 있다. 나는 항상 마주하고 적이다. 흑이고 백이다. 더 많은 색깔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삭제가 필요하다. 나는 항상 흘러넘치는 선물. 거리 곳곳을 옮겨 다니는 식물. 어떤 시각이든 필요하고 어떤 청각이든 고통을 빼먹는다. 핑계가 아니면 변명으로. 흐름이 아니면 덩어리로. 액체가 아니면 젤이라도 바르고 나타나서 밤을 움직인다. 밤에 움직인다. 나는 항상 서 있다. 거의 죽어 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묵직하게 달아나는 영혼을 붙잡고 있다. 돌로 눌러놓고 있다.


대학 시절 김춘수 시론을 들었던 경험도 떠올랐다. 우리는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무엇인가를 규정한다. 언어라는 것은 굉장히 편하고 효율적이고 좋은 구체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교수님의 말. 우리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았을 때 늘 이렇게 말하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 보여도 소란한 기계의 근거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입력 기계와 무출력 기계는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코의 설명에 의하면 무입력 기계는 예컨데 신과 같은 것으로 여느 기계처럼 무엇을 입력하여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입력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영원하며 스스로 무한한 출력을 할 수 있다. 즉 무엇을 투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조건을 넘어서 산출하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조건마저 초월하는 이 기계는 존재하기보다는 생각되는 것, 상상되는 것에 가깝다.


어려운 시집이었지만 오래간만에 진정한 사유를 하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괴롭지만 즐거운 일은 비단 연애 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짧고 작은 우스갯소리를 남겨 본다. 다양한 즐거움을 아는 것도 인생에서 꽤 멋지고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앞으로 독자인 나에게 김언 시인의 시집은 꽤나 어려웠지만 그래도 해냈다!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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