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른들은 주야장천 장래희망을 물어댔다. 그때마다 나는 ‘현모양처’라는 제 딴에는 제법 고급스러운 어휘로 장래 희망 칸을 채워 넣었다. 현모양처를 한자로 쓸 수는 없었지만, 그게 호빵도 잘 만들고, 내 피아노도 척척 사주는 멋진 엄마가 되는 걸 의미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현모양처인 우리 엄마를 동네 사람들도 좋아했다. 어쩐지 그런 근사한 엄마가 장래 희망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앞집도 옆집도 다 결혼해서 아이도 기본 둘씩은 낳던 시골 동네였다. 할아버지가 낳은 자식은 아빠가 되었고, 그 아빠의 분신인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게 그 세상 순리인 줄 알았다. 나도 언젠가는 우리 아빠처럼 잘생긴 사람을 만나 자연스럽게 남들 다 인정하는 현모양처가 되는 줄 알았다. 이젠 아빠가 세상에 없지만,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가 그런 남자를 보내줄 거라 믿었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30대 초반이 되자 곁에 두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친했던 동기의 결혼 발표가 결혼에 대한 조바심에 마중물을 부었다.
“민정아, 나 내년 2월에 결혼하기로 했어.”
겨우 몇 달 안 남았는데, 갑자기 미혼 친구에서 유부녀 친구가 된다고? 약지에 번쩍이는 커플링은 또 언제 생긴 거지? 이제는 엄마를 떠나 다른 집에서 살게 됐다고? 머릿속에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좋겠다. 정말 축하해.”
잠시 놀라고 마음껏 축하해주고 나자, 내 현실이 보였다. 이제 막 취업 한 동갑내기 남자 친구, 작년에 오빠가 결혼하는 바람에 나와 단둘이 남게 된 엄마, 그리고 아무것도 준비된 것 같지 않은 나. 언젠가 할 결혼이, 가장 친한 친구의 현실로 다가오자 나도 바삐 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숙제 마감이 곧 내일인 것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이제 퇴근하고 친구와 같이 옷 가게 가는 일은 줄어들 거고, 주말에 도시락을 싸서 서해 작은 섬으로 놀러 가는 일은 사라지겠지. 그날 나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케를 꼭 내게 주고 싶다는 친구의 결연한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고, 부케를 받으면 곧 결혼이란 걸 해야 할 것 같은 아무도 주지 않은 압박감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 친구는 꽤 시의적절하게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내 주변 상황을 읽은 그의 기민한 눈치 덕분일까, 그는 남들 다 간다는 결혼 박람회부터 알아봤다. 박람회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이 나를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신부라는 생전 처음 듣는 달콤한 단어에 홀려 스드메를 계약하고 당장 웨딩 투어에 나섰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결혼했다. 친구의 결혼이 부러웠지만, 내가 실행하기엔 아직 엄두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대단한 계획과 결의도 없이 어쩌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서른에 했다. 마치 마침내 결혼할 시기가 도래해 온 우주가 날 결혼식장으로 떠민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식장에 들어섰다. 남들 다 입는다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남들 다 간다는 신혼여행에 다녀왔으며, 남들 다 한다는 허접한 집들이도 몇 번 대접했다. 그렇게 어쩌다 새댁이 되었다.
엄마의 그늘 아래에서 꽤 시원하고 안전하게 살던 나는 이제 태양의 직사광선을 직격탄으로 받는 날들이 생겼다. 계란프라이를 센 불에 하면 기름이 온 사방으로 튄다는 사실을, 세탁기의 먼지 거름망 청소를 제때 하지 않으면 옷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나온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루는 세탁기에 빨래가 쌓여 세제를 넣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이거 매일 엄마가 해주던 건데, 엄마는 이 많은 집안일을 식당 일하고 와서 새벽까지 다 했던 거야? 이여사 진짜 철인이었네, 철인. 보고 싶고 미안하고, 또 고마웠던 거 같다. 결혼하면 철이 좀 들여나 싶었는데, 세탁기 앞에서 나는 아주 조금 어른이 되었다.
기안84는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라 불린다. 나는 결혼한 김에 살림하는 여자처럼 살고 있다. 결혼이란 걸 했으니 응당 아침밥을 하고(꼭 밥은 아니지만), 동거인이 생겼으니 당연히 때때로 청소도 한다. 이런, 아이까지 둘이나 생겼으니 안 보던 육아나 교육 관련 책을 보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을 나와 180도 바뀐 삶에 15년째 적응 중이다. 아직도 가격이 적당하며, 세탁이 잘 되고, 향기가 좋은 세탁세제를 찾고 있다. 아직도 거실 아무 데나 두어도 되며, 자주 들여다보지 않아도 결코 죽는 법이 없는 불사조 같은 식물을 찾아 헤맨다. 결혼이란 걸 했으니까. 집이란 게 생겼으니까 그렇게 안 하던 짓들을 자꾸 하고 있다.
요새는 사람들이 결혼을 잘 안 한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으니, 출산율이 적어져 머지않은 미래에는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이야기마저 들린다. 결혼 비용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완벽한 짝꿍이 나타나지 않아,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져서가 이유가 되려나. 내 주변에도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친구들이 몇 있다. 그들에게 결혼을 쉽게 권하기도, 그렇다고 결사 반대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다. 유경험자조차 현재 근근이 결혼이란 걸 겪고 있고, 결코 녹록지 않은 날들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밥을 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