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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하 Mar 09. 2024

사람들이 이상형을 기다리는 이유

흔히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이상형을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이상형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이혼한 50대 중년에 이상형을 생각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으나 적어도 난 왜 이상형을 기다리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 생각해 봤다. 내가 아는 어떤 이혼한 중년여성은 평생 혼자 살더라도 이상형의 남자를 기다리며 사는 삶을 선택했다. 어떤 여자는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이어야 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주체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이 경우도 표현은 다르지만 자신이 맘에 드는 이상형을 기다린다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주변에 관계가 좋은 부부나 커플을 보면 그들은 마치 서로의 이상형을 발견한 듯 행복해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엔가 있을 나의 반쪽'(서정윤)을 기다린다.

인간은 언제부터 이상형(Ideal Partner)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고대 중국 공자시대 때 사람들은 이상형을 기다렸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든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옛날에는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하는 게 보통이었고 경제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하고도 잘 사는 경우들이 많았다. 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이상형이라는 생각은 플라톤 이후 서양의 형이상학적 관념주의(Metaphysical Idealism)와 근대의 로맨틱시즘(Romanticism)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Idealism

플라톤의 이상주의(Idealism)는 이상국가(The Republic)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어디에도 이상적인 국가가 존재한 적은 없었다. 칼막스는 공산주의 국가가 이상국가일 거라 생각했으나 그의 생각이 틀렸음은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에는 이상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나 죽어서 가는 천국은 이상국가(The Kingdom of God)일 거라고 기독교는 믿고 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천국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믿음의 영역이다. 이런 이상주의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돼서 이상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어디엔가 있을 나의 이상형을 기다리고 사는 건 마치 천국을 기다리며 사는 것과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라며 사는 것과 유사하다.


Romanticism
또 한 가지 이유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낭만주의이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전 유럽을 장악했을 때 북유럽의 게르만족의 문화가 기독교 문화에 반기를 들듯이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의 결혼과 사랑에 관한 생각은 사도바울의 결혼관에서 비롯되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고린도전서 7장 2절) 그리고 그는 웬만하면 자신처럼 독신으로 살라고 권고한다. 한 철학자는 남녀 간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성욕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Arthur Schopenhauer).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사랑과 성적욕망에는 어떤 관계가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남녀 간의 상렬지사는 불경스러운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를 지나면서 인문주의가 발달하게 됨에 따라 인간의 본능적 사랑을 갈망하고 정당화한 것이 낭만주의이다. 이런 생각은 Grimm Brothers의 Sleeping Beauty나 Cindellela에 잘 반영되었고 Hollywood는 이를 대중화에 성공시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은 흰말탄 왕자를 기다리는 관념을 가지고 산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근대의 낭만주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상형을 기다리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는 환상을 만들었다. 그럼 왜 이게 환상인지 생각해 보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칼막스의 공산주의 사회도 도래하지 않았다. 그럼 주변에 이상형을 만나 평생을 사랑하며 동고동락한 사람들이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그런 커플이나 부부들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어느 나이 든 노부부가 노년에도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같이 늙어가는 걸 보면 우리는 저 사람들이 이상형을 만났기 때문에 저렇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만남이 이상형과의 만남이어서 오랫동안 백년회로를 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알 수가 없다.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 노부부들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인격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애를 키우고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냥 그렇게 평생 동거동락하게 됐을 수도 있다. 그들의 long-term relationship의 비밀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사실은 그들이 이상형을 만났기 때문이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Erich Fromm은 그의 명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에서 사람들이 좋은 사랑의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이렇게 분석했다.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The problem of love is the problem of an object, not the problem of a faculty.
People think that to love is simple, but to find the right object to love is difficult."

즉 평생연분을 못 만나서 실패한 것이지 내가 사랑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안 좋은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 없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도 계속 대상을 기다릴 뿐 스스로에게 사랑에 대한 능력을 배우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고 열정적일 수는 있으나 깨지고 상처받기 쉽다. 성숙한 인격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배려심과 인격의 성숙함은 좋아졌는데 젊은 날의 열정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분명한 건 사랑에 대한 기술(능력)은 평생을 두고 인간이 배워야 할 숙제인 것이다.

긴 인생에서 누구나 한두 번은 이상형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Success occurs when opportunity meets preparation) 사람들은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 난 후 계속해서 이상형을 기다리고 산다. 나이가 40 또는 50이 돼서도 혼자 사는 사람의 변명을 들어 보고 싶다. 그들은 아마 좋은 인연을 아직 못 만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벌써 나이가 들어 버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고대 문명시대에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인류는 자식생산을 못해서 멸종되었거나 적어도 지금의 인구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결혼과 성관계가 자식을 낳고(Procreation) 농사를 짓고 생존하는 수단이었으나 오늘날 결혼은 너무나 복잡하다. 이 복잡한 생각의 원인이 플라톤식 이상주의와 근대의 낭만주의의 영향이라고 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 분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게 원인이라면 이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또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오랜동안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서양은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낭만주의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상식이 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드라마는 이 낭만주의의 허구적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문화와 생각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을 수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지성적 노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문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와 이 문화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고 내 무의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심연의 깊은 곳까지 들야다 보아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이 이데올로기(Ideologies)의 영향력에서 조금이 나마 스스로를 멀리할 수 있다. 아무도 완전히 이런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문화의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자신을 시대의 문화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이 생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 결정이 이런 생각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분별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이상형을 나이 50이 넘어도 무작정 기다리는 대신 나의 이상형이 너무 기준이 높은 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이상형이 아닌 사람과 만나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노력이 아마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짧은 인생에서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해지는 선택을 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내가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당신이 선택한 이상형 때문에 오늘도 당신은 불행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는 당신을 붙들고 있는 관념적 이상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한 하나의 선택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사랑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걸 사랑하라 (니체)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이상형을 기다리는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젠 이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왜 인간은 관념적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를 만들어 내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이를 더 강하게 붙잡고 살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Platonic love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Romantic 한 만남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런 관념적인 생각에 더 집착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다 분명 천재였지만 아리스토 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완벽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물론 그도 플라톤식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럼 무엇이 사람들 더 관념적이게 하고 덜 관념적이게 할까? 미국의 Pragmatism 철학을 주장한 John Dewy는 아마도 이상주의자 이기 보단 실용주의 자였다. 신이 죽었다고 한 니체도 보이지 않는 관념을 추구하기보단 만질 수 있는 볼 수 있는 몸을 중심으로 인생을 살기를 권고한다. 인. 의. 예. 지. 신을 강조한 공자는 어느 정도 이상주의자에 가깝지만 무위자연, 도가도 비상도를 주장했던 노자는 분명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두 분류의 사람으로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딘가에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질문을 하고 벌써 장문의 글을 남겼을 수도 있지만 짧은 내 지식으로는 현재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인간의 뇌 구조와 이런 성향이 무관 하지 않다는 점이다.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수학과 음악이 연관성은 있지만 사람의 성향이 이렇게 달라지는 데는 분명 뇌구조의 원인이 크다. 엔지니어가 철학자가 될 수도 있지만 이들이 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분명 타고난 뇌구조, 즉 우리가 기질이라고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또 뇌과학분야를 탐구해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냥 내 개인적인 직관으로 답을 하자면 형이상학적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머리가 좋다는 비학문적 표현은 추상적인 생각을 잘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도 이에 해당될 것이고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예술은 본디 아름다움의 이상을 추구하는 노력이다 보니 예술가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이상형에 대한 갈망이 있다. 내성적인 천재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삶은 우울하거나 불행하다. 물론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나의 의견은 어디 까지나 research and analysis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직관에 기반한 개인적 의견 일 뿐이다.


프랑스의 천재화가 고갱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이티에 가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에게 그 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 보다 더 행복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더 행복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은 바로 비문명에 있지 않을까? 노자가 말한 비문명의 철학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생각에 생각을 더해서 복잡한 관념과 도덕을 만들어 내고 결국 스스로를 그 굴레 안에 집어넣는다. 예수님이 시작한 사랑의 사역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을 받으리라는 설교였지만 훗날 기독교는 엄청난 교리를 만들어 냈다. 신학교를 몇 년을 다녀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교리의 역사를 지닌 게 기독교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리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서로 사랑하며 살게 만들었을까? 인간의 이성은 때로는 지나치게 이성주의가 되어 인간의 단순한 삶과 행복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근대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대해서 생철학과 실존주의 같은 철학이 생겨난 게 아닌가?

똑똑한 인간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되는 폐단을 바로잡고자 인간은 또 다른 철학을 만들어 냈다. 관념적 이상형을 기다리는 사람은 추상적 사고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세계관이라고 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굶어 죽어도 아름다운 사랑을 추구하는 고귀함.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완벽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다리는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미화한다. 하지만 난 이런 선택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성욕의 본능을 억누르고 금욕적으로 살면서 평생을 성적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인생을 어떻게 미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기 이전에 몸의 존재이다. 이성이 강한 사람은 몸의 욕망을 이성적으로 절제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삶이 동물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에게 결코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형을 기다리며 평생 독신으로 사는 여자들에게 묻고 싶다. Are you really happy with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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