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종하 Apr 06. 2024

결혼예찬 vs. 이혼예찬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결혼을 예찬해 왔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게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좋은 결혼을 하기 위해 삶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생각했던 데로 행복하게 죽을 때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바뀌었다. 이혼율이 50%를 넘어서고 이혼하지 않은 부부들 중에도 법률상 이혼만 하지 않았지 행복과 거리가 먼 졸혼상태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당수임을 추측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이혼한 여성들 중 이혼을 예찬하는 표현들이 있다. "실패한 결혼은 있어도 실패한 이혼은 없다." 언뜻 이해가 잘 가진 않지만 이혼이 정당한 선택임을 주장하는 것 같다. "The divorce is the best thing happened in my life." 이 여성은 전 남편과의 부부관계가 아주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 살다가 이혼한 경우라서 그 이후 만나게 된 남자한테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남자와 재혼에 성공하진 못하고 여전히 혼자 산다.


이혼율이 높아진 상황에서 당연히 이혼예찬 분위기가 올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브런치 작가님들 중에도 이혼을 예찬하는 글들이 많이 있고 이혼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님을 강조하는 문화가 널리 퍼지고 있다. 화려한 돌싱이라는 표현도 이혼한 사람들을 미화하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혼이란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분위기다. 물론 지금까지의 분석은 개인적으로 느끼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나의 소견일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결혼예찬론을 꺼내 든다면 과연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걸 지지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이혼한 사람으로서 난 여전히 결혼예찬론을 지지하고 싶다. 이 글은 근래에 떠오르는 이혼예찬에 찬물을 끼 얻으려는 의도는 아니다. 특히 이혼 후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어렵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혼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혼자 경제활동을 하며 애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을 존중한다. 나도 두 명의 아이가 있다.



인류문명사 전체에서 이혼이 요즘처럼 많은 경우가 없었고 이혼예찬이라는 고전은 읽어본 적이 없다. 분명 이혼이라는 문화는 현대에 와서 확산된 생각임이 틀림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급부상하게 된 생각에는 항상 조심스러운 분석이 필요하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본주의가 확산될 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한 칼 막스처럼, 새로운 아이디어가 확산될 때 잠시 멈춰 서서 그 생각을 깊게 들여다보는 게 필요하다. 막스의 분석은 유효했지만 자본주의의 확산을 막진 못했다. 누군가 현재 확산되는 이혼율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아마도 이혼의 증가추세를 막을 순 없을 것 같다. 갑자기 자본주의와 이혼문화를 비교하고 나 자신을 막스에 비유한다는 게 우습지만, 난 갑작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이혼문화에 반대하고 결혼예찬론을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난 행복한 결혼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혼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편견이 적은 상태에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행복한 삶을 위한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최선의 제도인가? 어떤 이혼한 여성은 결혼이라는 법적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혼은 손쉽게 언제든지 사회적 비난 없이 취소되어야 하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이 깊게 반영된 주관적인 주장일 수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혼과 이혼을 비교할 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경제적인 요인, 정서적인 요인, 자녀출산과 양육, 그리고 사랑. 하지만 난 이 중에서 한 가지 우리가 흔히 부부관계라고 하는 성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비교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성과 자녀출산이 가장 근본적인 결혼의 기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문명에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결혼이라는 관습과 문화를 통해 두 남녀가 공동체의 인정 안에서 자유롭게 섹스를 할 수 있는 제도라는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제도 안에서 두 남녀는 exclusive 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다른 사람이 침범 할 수 없는 법적 문화적 보호망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제도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한번 결혼하면 쉽게 이혼하기 힘들다는 점과 이혼하게 되면 공동체 내에서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도의 본질적인 의도를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없는 사회보다 있는 사회가 성적문란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상상해 보라 결혼이 없는 공동체를. 젊은 남녀의 사랑과 그 관계를 상상해 보라. 법적 보호망이 없을 경우 피해받는 여성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미국은 no-fault divorce라서 어느 쪽의 귀책사유 없이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50%의 재산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요즘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제도지만 이 제도가 시행된 것은 1969년이다. 이 전에는 대부분의 여성은 이혼으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결혼이란 제도의 부작용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리고 뭔가 새로운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결혼제도를 대체할 다른 대안이 있을까? 바람피우고 폭력적인 남편과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결혼이라면 쉽게 이혼하고 또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할 것이다. 결혼 전 동거하는 문화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던가 아니면 한번 해봤더니 아닌 것 같다면 쉽게 return(?)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제도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제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요즘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서 능력 있는 여성들은 오히려 이혼을 먼저 요구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쿨한 여성은 이혼하면서 위자료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내 부모님 세대에서는 혼인신고 없이 동거하는 여성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즉 결혼이라는 법제도는 약자에 대한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경제적인 독립심이 늘어나고 주체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가족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해지는 문화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혼이 예찬되는 이유는 결혼제도에 대한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부부간의 Relationship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즉 결혼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부부의 관계는 제도적으로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위태로운 관계가 되어 버렸다. 전에는 남편이 밥상을 뒤엎어도 참고 살았는데 요즘은 남편이 집안일을 안 도와줘도 이혼사유가 된다. 전에는 애들 때문에 참고 사는 여인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애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렇겐 못살겠다는 생각이 많이 늘어났다.


부부간의 관계가 안 좋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소통의 부재, 배려의 부재,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 그리고 사랑의 부재. 근본적으로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다.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아서 되는 일도 아니다. 양쪽이 성숙한 태도를 가지고 서로 노력해도 잘 될까 말까 한 아주 어려운 일이다. 배우자에게 심한 결격사유가 있지 않은 대부분의 이혼 사유는 바로 이 어려운 관계유지를 잘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된다는 게 이혼의 변명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혼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요번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 관계를 위한 좋은 기술과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누구를 만나도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누굴 만나고 사귀는 것 자체가 골치 아파서 혼자 사는 걸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삶에서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나면 회피하거나 차선을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힘들더라도 오랜 시간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까? 이 또한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혼예찬을 하는 경유 혹시 이런 노력을 포기한 자신을 이혼이 새로운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인적으로 내가 이혼을 선택했을 때 가졌던 생각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난 나의 선택을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난 분명 좀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포기했다. 물론 쉽게 포기한 건 아니지만 좀 더 노력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내가 결혼을 예찬하는 이유는 결혼만 하면, 결혼제도 안에서는, 부부의 관계가 건강하고 원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관계의 문제는 결혼을 떠나서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는 숙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앞에서 얘기한 성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결혼제도 안에서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해지는 성문화의 변화 때문에 요즘은 결혼 외에서도 충분히 남녀 간의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 능력 있고 인기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이 다 성숙하면 하게 되는 황혼이혼의 경우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이 50을 넘긴다. 이 나이에도 외모가 출중하거나 돈이 많은 여성들은 재혼시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이 여성들이 재혼할 가능성은 훨씬 더 힘들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100세 시대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남은 40 ~50년을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예찬할 일이 아니다. 난 비교적 긴 결혼생활(20년)을 하고 이혼하게 되었다. 지나간 내 삶이 다 부정받는 느낌이고 내 아이들과 내가 헌신했던 가정이 다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지만 생각해 보면 20년이라는 시간은 내 인생의 20%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다. 당신이 결혼에 대한 상처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상처이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미숙한 우리들은 잘못된 만남으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하면서 인생을 산다. 살면서 배우고 성숙해지면서 관계기술이 발전하면 좀 더 성숙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다시 결혼할 수 있다. 이혼을 예찬하며 남은 인생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만나더라도 결혼을 주저하면서 회피하는 건 한번 받은 상처가 너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이혼을 failed marriage라고 표현한다. I hate this expression. 마치 내가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뜻인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내가 fail 한 게 한 가지 있다면 부부관계를 좋게 계속 유지하지 못한 것이지 내 결혼 생활전체가 실패라는 뜻은 아니다.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친구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어서 양방이 같이 노력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상처에 반응하는 태도가 다르다. 물론 상처의 깊이에 따라 다르기도 한다. 하지만 결혼에서 받은 상처가 두려워 남은 인생을 이혼에 만족하고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평생 외롭게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소중하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다. 때론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난 두려운 일이 생기면 전에는 기도를 했었는데 요즘은 두려움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몇 달을 그 두려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어느새 그 두려움이라는 녀석은 처음보다 그렇게 두렵지 않은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 이혼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사정과 심리를 충분히 이해한다. 불행한 결혼을 끝내야만 했던 상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남은 삶을 이혼을 예찬하면 살 것인지 힘들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해 결혼을 예찬하며 살 것인지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예술은 고독에 대한 자기 방어적 표현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