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종하 Apr 24. 2024

사랑하면 라면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이유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아무리 사랑해도 라면만 먹고살 순 없잖아."라고 말하는 이유는 물질과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유모 섞인 극단적 표현이다. 이외에도 "결혼하고 손가락 빨고 살래?"라는 표현도 같은 뜻이다. 우리의 일상에는 이런 생각들이 마치 광고카피처럼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 이렇게 지배된 생각은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신념(Conviction)으로 형성되고 결국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로서 이런 표현들을 대화 중에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 선택이나 물질적인 선호를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왠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막연한 의구심을 정말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 라면과 손가락이 상징적 비유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라면"과 "손가락"을 강조하며 물질의 중요성을 한번 더 강조한다. 논의를 위해 이런 표현들을 약간 관념적으로 재 구성하자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물질의 필요를 초월할 수는 없다." "결혼하게 되면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이 될 것이고 분석을 위한 충분한 단어들이 등장한 듯싶다.



사람들이 아무리 사랑을 해도 현실의 어려움이나 물질의 필요에 의해 힘들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첫째, 물질만능주의에 너무 익숙해져서? 둘째 물질이 사랑보다 중요해서? 셋째 사랑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돈은 필요한 거 아냐?라고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에 알게 된 한 여성은 자신이 돈을 밝히는 속물적인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왠지 돈을 밝힌 것에 대한 죄책감을 스스로 느끼는 듯하다. 오늘날 현실은 이념이 사라지고 철학도 사라지고 오직 물질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문화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초등학생들에게 미래 꿈을 물어보면 과거에는 Astronut, Firefighter, President, or Pro-sports player였는데 요즘은 거의 대부분 Billionaire가 답이다. 10여 년 전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한 동양 남자아이가 자신의 꿈을 자신 있게 말했다. "Billionaire." 그때는 듣는 부모들이 다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냥 웃어넘길 일 만은 아니다.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해지기 시작한 지는 이미 10년이 훨씬 넘었다. 특히 내가 사는 실리콘밸리는 부모들이 벤처를 하거나 대박 치는 Tech회사의 직원인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 2세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동적으로 꿈이 결정된다. 이 동네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애들도 별로 없다. 그들의 직업군은 이 동네에서는 최상의 선택은 아니다. 


이런 자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주장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underestimate)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권력으로 작용하고 돈이 신처럼 숭배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잠시 벗어나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우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 보자. 몸이 아프거나 불편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병원, 의사, 학교, 나라, 어디든지 부모는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전형적인 사랑의 힘이다. 혹시 부모의 사랑은 아가페(Agape)적 사랑으로 남녀 간의 사랑(Eros)과는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도 성애적 사랑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헌신한다는 점에서는 아가페적 요소가 있다.


또 한 가지 예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Amazing Grace)를 생각해 보자. 설교시간에 흔히 듣던 말인데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즉 은혜는 사랑인데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나 천한 신분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돌아온 탕자를 반겨주는 아버지의 사랑이나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용서하는 신부의 사랑 같은 것이다. 한때는 노예상인이었던 John Newton이 회개하고 거듭나면서 작사한 곡이 Amazing Grace이다. 이런 형태의 사랑에는 엄청난 힘이 있고 사랑받는 사람을 변화(Transform)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힘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많은 교리에 비판적이지만 이 은혜라는 교리는(The Doctrine of Grace)는 아마도 기독교를 지켜주는 아주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신이 죽었다고 말한 니체 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위력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사랑은 종교적인 사랑이라서 남녀 간의 사랑과는 별개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남자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위 두 가지 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만든다. 둘째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평범한 결혼 생활에는 이런 엄청난 사랑의 힘이 왜 느껴지지 않는 걸까? 왜 내 남편은, 내 아내는 평생 똑같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 걸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왜 배우자의 변화가 없는 걸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삶에 위기가 없고 평탄한 가정엔 사랑의 힘이 발휘된 기회도 없다. 고난이 없는 평탄한 삶은 긍정적인 것이다. 일부러 사랑의 힘을 경험하기 위해 어려움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단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에는 평범한 사랑만 있을 뿐이다. 난 이런 사랑도 좋다고 생각한다. 둘째, 사랑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과 라면을 비교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아마도 "괜찮은 남자, " "좋아하는 여자, " 정도의 의미이지 위의 두 가지 예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감정이다. 남자는 괜찮은데 돈이 없어서 싫다고 말하는 경우 사랑은 하는데 라면만 먹고살 순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애당초 여기에 사랑은 없는 것이다.


정말 사랑으러운 남자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거기에 라면을 대입해 보자. 어떤 남자가 자신만을 이뻐하고 아껴주고 섬세하게 자상하며 거기다 자신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고 변화해 가며 성장하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돈이 없다? 이런 경우 당신은 라면만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이 남자를 포길 할 것인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런 남자나 여자가 있다면 대부분의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없고 이런 사랑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물질주의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랑보다 물질 자체가 더 좋아서가 아니라 이런 최고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주위에서도 별로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물질적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는 이런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내 삶에 찾아오는 행운이 있게 된다면 기꺼이 난 라면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다 보면 가끔 파스타(?)를 먹는 날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또 한 가지 사람들이 사랑을 과소평가하는 이유는 위에 말한 변화의 힘뿐만 아니라 사랑이 지속되는 그 과정 속의 기쁨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선택할래 돈을 선택할래 라는 단순한 질문에 우린 아주 단순하게 반응한다. 아무래도 돈이 엄청 많으면 돈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우린 경제적인 풍요가 가져다주는 삶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좋은 집에, 차에 여러 가지 물질적 풍요를 상상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사랑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삶은 한참 생각을 해야 조금 감이 잡힐 정도이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풍요는 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가오지만 사랑이 가져다주는 풍요는 쉽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날 혹시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면 그때를 기억해 보자. 주말에 데이트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기분만 좋은 게 아니라 몸도 컨디션이 좋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혈색이 좋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즉 본게임 이전에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미 행복지수는 엄청 높아진다. 연인을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낼 때 느끼는 기쁨을 생각하면 이 행복지수는 이미 정점을 넘어선다. 사랑은 엄청난 도파민 릴리스(Dopamine release)를 가져다준다. 물론 평생 이런 상태로 살 수는 없겠지만 만일 삶에 이런 상태가 자주 반복되는 사랑이 있는 경우랑 단지 돈이 많아서 행복한 상태를 비교해 본다면 당신은 어떤 상태를 선택하겠는가? 사랑하면 라면만 먹어도 살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랑이라는 게 삶에 엄청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내일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랑의 관계에 있다면 그까짓 라면쯤이야 한 끼 더 먹을 수도 있다.



이쯤 얘기를 해도 어떤 사람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돈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그 이유는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문화적 관성 속에 살기 때문에 잠시 벗어나 있어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웬 사랑타령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 수 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중력을 이겨내고 하늘을 날게 된 것처럼 중력의 영향권 안에 있지만 중력에 지배받지 않고 살 수는 있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삶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예찬 vs. 이혼예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