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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아 Jun 26. 2024

황혼이혼

<황혼이혼>


“내가 나중에 애들 다 크고 그러면 그때 황혼이혼? 그거 해줄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시부모님과 식사하며 술 한 잔 기울인 남편은 집에 돌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황혼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뭐라고? 황혼이혼이 뭔 줄은 알고 하는 말이야?”라고 어이가 없어 되묻는 나.

“내가 지금은 어렵지만 애들 다 크고 하면 널 자유롭게 놓아줄게. 그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리고 지금도 나랑 안 맞고 애들 키우는 것도 힘들테고. 다 알아. 남자 셋이랑 사는 게 쉽겠어? 근데 지금은 안되니까 우리가 나이 들고 애들도 다 크면 그때는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놓아줄게”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지만 말을 이어가는 남편의 눈이 촉촉 해지는 걸 보고 이 사람 정말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는 밤이었다. 물론 그 후로 술주정을 하는 것이냐, 그런 마음이 있으면 평소에 나한테나 좀 잘 해 봐라 하는 남편을 향한 핀잔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남편이 꺼낸 ‘황혼이혼’이란 단어를 듣고 그동안 숱하게 싸워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편 따라 온 타지에서의 생활은 몇 년이 지나도 나아질 것 없이 외로웠고, 아이 둘 양육하며 마주하는 불안함, 두려움은 온전히 내가 겪어내야 할 몫이었기에 늘 힘에 부쳤다. 그럴 때마다 나 좀 봐달라고,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남의 일 바라보듯 하던 남편이었다. 내가 정말로 필요로 할 때 그의 시선은 늘 세상 재미난 거리들을 향해 있었고, 남편의 기준에서 건네는 위로나 배려의 말들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기대와 실망, 엇갈리는 표현들에 지쳐 더이상은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단념하게 된 지 2년 정도 지났다. 내 딴에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매번 상처받는 나를 지키기 위한 찬란한 체념이었다. 그렇다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거나, 수용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미워 죽겠지만 밀어낼 수 없는, 쌤통이다 싶다가도 걱정되는 이 복잡한 감정이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이었다. 그런 존재인 남편의 입에서 나온 ‘황혼이혼’이라니. 그것도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기 위한 이별이라니!


‘황혼이혼’

진심이었을지 술주정이었을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그 단어가 나에게는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를 향한 내 하찮은 사랑 겉을 더 단단하고 강한 무언가가 지켜주는 듯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 자유롭게 놓아주겠다는 기한 없는 사랑의 표현 같았다. 남자 셋과 사는 고충을 이해하고 조금만 더 버티라는 위로의 말로 느껴졌다. 그동안 남편으로서 잘 못해서 미안했다는 사과의 말이자 애써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표현으로 들렸다. 어쩌면 과한 의미 부여일지도 모르겠고,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래의 헤어짐을 말하던 그의 목소리, 촉촉한 눈빛에서 나는 분명 커다란 ‘사랑’을 느꼈다. 취중에 던진 그의 다소 특이한 사랑 표현 덕분에 그를 향한 나의 칙칙했던 사랑의 채도도 한층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황혼이혼을 해 줄 정도로 날 사랑하나 봐~~?” 라는 장난기 어린 나의 표현에 얼굴을 붉히며 “술 먹고 한 이야기 가지고 너무 그러지마!”라고 답하던 남편. 술주정이었냐며 빈정거리는 내 볼을 꼬집으며 “네가 뭘 알겠냐”라고 한마디 던지곤 출근길을 나섰다.

문득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우리의 관계가 이 정도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사랑하며 농익어 가는 우리의 관계.

진짜로 황혼이혼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관계로 지내고 있을까. 분명 지금보다 더 단단한 관계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적어도 진짜 황혼이혼은 안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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