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재발견

스몰토크 하고 싶은 적극적인 여자

by 아인장

엄마랑 단둘이 여행을 갔기 때문일까? 이번 여행에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집 모녀는 서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매일 저녁 운동을 갈 때마다 얘기를 하고 맛집이나 카페를 꼭 공유한다. 함께 한 대화의 양에 비례하여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


나와 엄마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우린 가치관이 비슷하지만 성격이나 성향, 관심사가 조금 다르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엄마는 나보단 아니다. 나는 적극적인 편이고 엄마는 나보단 덜하다. 나는 성격이 급하지만 엄마는 나보다 차분하고, 나는 모르는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되지만 엄마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살 부대끼며 살았어도 우린 참 다르고 그걸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엄마1.jpg 〈새로운 엄마〉 일본, 후쿠오카

하지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엄마를 발견했다. 적극적이고 스몰토크 잘하는 엄마라니? 내가 성인이 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나의 포지션은 분명하다. 나는 주로 주도하는 편이다. 여행 계획 짜기, 예약하기, 언어 담당, 길 찾기, 길 묻기, 돈 계산, 흥정하기 등 여행을 좋아하는 적극적인 계획러로서 많은 임무를 담당한다. 특히 언어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내가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가에 상관없이 외국인에게 손짓발짓해 가며 뭐라도 한 마디 하고 싶은 스몰토크 러버가 바로 나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말 거는 것 역시 주로 내 담당이고 엄마는 주로 "뭐래?"라고 묻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 중 하나는 언어 공부다. 엄마는 일본어를, 나는 중국어를 N년째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모국어 이외의 즐거움을 주는 다른 나라 말을 찾았고 개인적인 재미와 미래를 위한 투자로써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라는 건, 집에서 책이랑 씨름한다고 느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최소 12년은 공부한 영어를 금붕어처럼 뻐끔대는 한국인의 영어실력에 그 이유가 있다. 나는 영어에 대한 흥미를 소멸당한 것처럼 중국어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어 선택한 언어인 만큼 오래오래 재미있게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상 수업, 중국 원서 읽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입과 귀를 트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를 몇 년 전 대만에 가서 여실히 느꼈다.

KakaoTalk_20260406_183726066.jpg 2023 대만, 타이베이

중국 본토와 한자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나는 띄엄띄엄 대만의 흔적을 이해했다. 얼추 읽을 수 있는 메뉴판과 간판, 진짜 대만인과 간단한 스몰토크는 나를 몹시 기쁘게 했다. 함께 대만 여행을 갔던 사람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재미가 컸다. 번역기 없이 맨몸으로 부딪혀본 일은 외국어 학습자에게 큰 용기와 자신감을 선물한다. 내가 투자한 시간이 값진 보람으로 돌아오는 걸 확인하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도 일본 가면 진짜 재미있을 거야. 이것저것 다 읽고 싶을걸. 신기하게 그게 또 다 읽힌다? 그때 가면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알 거 아니야. 무슨 맛인지, 어떤 음식인지 그땐 엄마가 나한테 다 알려줘. 나 엄마만 믿고 간다. 일본에선 엄마가 언어 담당해."


엄마는 정말 그럴까, 하면서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모르는 한자와 가타카나가 너무 많아서 뭐 한 줄 제대로 읽는 것도 어렵다면서. 하지만 내가 보증했다.


"아니, 분명히 읽을 수 있어.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잖아. 내가 해보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돼. 우린 어차피 외국인이야. 그리고 보이는 게 있다니까. 솔직히 대만에서 엄마 까막눈이었잖아. 내가 읽어준 것들 다 엄청 쉬운 거였어. 근데 엄마는 하나도 못 읽었지? 그런 거야. 공부한 만큼 보이는 거라고. 일본 가면 그땐 내가 까막눈이야. 엄마는 나와 달리 술술 읽히는 게 많을 거고. 기대되지 않아?"


나는 언어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써온 말이 아니어도 다른 나라 말을 금방 배우거나 재미를 잃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공부했던 단어가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흥미를 잃겠어? 수많은 문장 다 읽진 못해도 아는 단어 한 두 개 나오면 신기해서 떠듬떠듬 읽어나가는 것. 그곳에 언어의 힘과 즐거움이 있다.




엄마는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곧바로 이것저것 읽기 시작했다. 공항 안내판들은 일본어 아래 영어와 한국어도 쓰여 있어 엄마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나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어디가 출구고, 어디가 짐 찾는 곳인지 알려줄 때마다 아낌없이 칭찬을 보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일본어 까막눈이 되었지만 엄마에게는 제3의 눈이 열린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일본어의 숨을 엄마는 느낄 수 있다.


일본에서 나는 주로 영어를 썼지만, 사실 그럴 기회조차 별로 없었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미리 번역기를 켜두고 일본인 직원에게 물어보려 다가갔지만 정말로 말을 걸 기회가 적었다. 휴대폰 번역기 화면을 보여주려는 나를 한 손으로 막고 "아노 스미마셍" 하며 말을 거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다가 엄마 때문에 막히다니! 정말 역사적인 일이다.

일본간판들_흰색배경.png 〈일본어 천국〉 일본, 후쿠오카

쇼핑몰에서, 밥집에서, 카페에서 엄마는 자주 나를 앞질렀다. 자기가 가서 물어보겠다며 심히 적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일례로 디즈니스토어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여행 첫날 저녁, 캐널시티 하카타점에 갔다. 하지만 영업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간 탓에 뭐 보지도 못하고 헛걸음하듯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다시 갔다. 첫날 못 본 오니츠카 타이거와 디즈니 스토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즈니 스토어는 천국이다. 내가 싫어하는 게 하나도 없다. 모두 귀엽고 예쁜 만큼 — 그리고 디즈니이기 때문에 — 값은 상당히 비쌌지만 유명한 캐릭터 상품들 하나하나 구경하는 맛이 있어 여행지에 있다면 꼭 찜해둔다. 캐널시티의 디즈니 스토어는 아주 넓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구경하기엔 충분했다. 이번에 가장 눈길이 갔던 곳은 '루시퍼(〈신데렐라〉 속 고양이)'와 '피가로(〈피노키오〉 속 고양이)' 상품 코너였다. 전반적으로 블랙 앤 그레이 톤인 상품들이 유독 예뻐 보였다. 디즈니 최애 캐릭터는 아니지만 이번엔 그랬다. 예쁜 파우치와 가방, 인형 키링들을 한참 만지작거렸지만 솔직히 정말 필요한 물건들은 아니었으므로 돌아섰다. 잠시 후 구경을 다 한 내게 엄마가 다가왔다.


"나 이거 살래. 어때? 이거 예쁘지."


엄마가 가져온 것은 골드색 미키 마우스 목걸이였다. 나는 주얼리에 딱히 관심이 없어 있는지도 몰랐는데, 엄마는 이게 눈에 띄었나 보다. 그러고는 혼자 사긴 그랬는지 너도 하나 고르라며 사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난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 나 뭐 사러 온 거 아닌데?"

"안 살 거면 여길 왜 왔냐?"

"그냥 구경하러 왔지. 다 너무 비싸잖아. 그리고 솔직히 진짜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휴, 여행 와서 사지도 않을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지. 난 이거 사고 싶은데. 너도 하나 안 할래?"

"엄마는 사. 그거 예쁘네. 근데 나 주얼리 잘 안 하잖아."

"싫어, 너도 사."

원래 여자들 쇼핑이 혼자 하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마음에 담아두었던 그 코너로 엄마를 데려갔다.


"난 솔직히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그나마 쓸만한 건 가방인데, 이건 좀 비싸서···."

"네가 가방이 어디 있어? 이거 괜찮네. 이거 하나 사."

"내가 가방이 왜 없어? 나 캉골 에코백 있잖아."

"캉골? 야, 제발 그거 좀 버려라."

"그걸 왜 버려? 근데 이거 4,500엔이야. 너무 비싸."

"가방이 그 정도 하지. 으이그."

루시퍼_흰배경.png 〈루시퍼〉 일본, 후쿠오카

워낙 물건을 잘 안 사는 나는 그냥 있는 거 쓰는 타입인데, 굳이 고르라면 가방이 좋겠다 싶었다. 한참을 사네, 마네, 사면 어디 갈 때 들 수 있네, 없네 토론을 하다가 결국 책 한 권과 그림 도구 정도 넣을 수 있을 루시퍼 스트링 백을 하나 골랐다. 그런데 아쉽게도 새 상품이 없어 진열되어 있던 걸 가져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다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 새 상품이 없고, 디피 상품을 가져간다 해도 할인은 불가하대서 어쩔 수 없이 그 가방을 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상품 문의가 이루어졌던 전 과정을 엄마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나는 눈치와 상황 맥락으로 엄마와 직원 간의 대화를 이해했다.


"이거 새 상품은 정말 없나요?"

"네, 이게 마지막 하나 남은 거예요."

"이거 가져갈 건데, 혹시 할인은 안 될까요?"

"아··· 죄송합니다. 할인은 어려워요. 이게 진짜 마지막 물건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면세는 어디서 받을 수 있나요?"

"결제는 여기서 하시고, 면세는 1층 가시면 면세받는 곳 있는데 거기서 하시면 됩니다."


대략 이런 대화였던 것 같다. 혼또니 일본어로 이어진 대화. 나는 그저 옆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와 직원의 대화가 끝나고 직원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뭔가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는데, 이 역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린 가방과 목걸이, 그리고 지인에게 선물할 펜 몇 자루 사서 1층으로 향했다. 면세를 받으러 가는 길, 엄마에게 물었다.


"아까 마지막에 뭐라고 한 거야? 그 직원이 되게 좋아하던데."

"정말 친절하시다고 했어. 넌 못 알아들었냐?"


일본어 깡깡이라고 나를 놀려먹으며 간단한 대화 몇 마디로 자신감과 뿌듯함이 가득 충전된 엄마를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스물한두 살 정도 되어 보였던 젊은 디즈니 스토어 여직원에게 건넨 어느 한국 아줌마의 말 한마디가 그녀의 하루를 잠시나마 따스하게 만들었다면 좋겠다. 한국인이 말하는 또박또박 일본어지만, 그 속에 담긴 노력과 쏟아부은 시간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고맙습니다' 대신 '친절하세요'라는 개인적인 칭찬을 건넨 한국인과의 만남이 아주 가끔씩 그녀가 일할 때 마음을 위로하는 기억이 되면 좋겠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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