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리 공원 스타벅스에서
후쿠오카를 여행하면 대부분 교외 지역까지 가본다고 했다. 유후인이나 다자이후 등 후쿠오카 시내를 벗어나 인근 지역까지 돌아보는 일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오사카 가면 교토는 꼭 가는 그런 느낌일까? 그렇게 여행을 계획하던 중, 작년에 후쿠오카를 다녀온 친구가 한 스팟을 추천했다.
"오호리 공원은 갈 거지?"
공원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굳이 가야 할까? 미안해. 나 사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어. 후기 사진들을 찾아보았지만 일본의 잔잔한 호수 공원이 내 마음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약 1시간 넘게 이동해서 시내를 벗어나야만 하는 그 밖의 교외 지역이 더 안 끌렸으므로, 하루쯤은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안 지루할 수도 있고.
우동집에서 붓카케 우동과 매운 우동 한 그릇씩 먹고 소화시킬 겸 오호리 공원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로컬 마트도 구경하고, 일본 편의점도 나올 때마다 들렀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한국에선 집 앞에도 있는 편의점인데, 어째 일본에서는 지나가는 발걸음 걸음마다 멈추게 하는 힘이 있는지. 그 안에서 파는 것들이 다 신기하고 맛있어 보여 세븐일레븐이든 로손이든 패밀리마트든 보일 때마다 은근슬쩍 들어가곤 했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공원 간다는 핑계 삼아 작은 간식들을 하나 둘 주워 담고 말았다.
방앗간 못 지나치는 참새처럼 여기저기 들렀다 겨우 도착한 오호리 공원은 생각보다 정말 멋졌다. 탁 트인 호수뷰와 잔잔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없는 색다른 매력이 있냐 물으면 그렇다 대답할 놀라운 후기는 없지만 그냥 평화로운 장면 그 자체만으로도 왜 후쿠오카를 다녀온 사람이 여길 추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풍경에 반하기도 잠시, 우리는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한 잔의 카페인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도록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니 정신이 안 깼다. 아, 그래서 여기가 더 멋져 보였나? 일종의 환각? 엄마와 오호리 공원 가서 커피를 마시자 약속했기에 지나온 여러 마트와 편의점에서 캔커피 하나 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카페로 가는 수밖에. 그런데 이런 멋진 뷰를 앞에 둔 카페에 과연 자리가 있을까? 제발, 조금 더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오호리 공원 근처에는 카페가 몇 개 있는데,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스타벅스였다. 일본 스타벅스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궁금했다. 한국과 뭐 다를 게 있을까 싶지만, 익숙한 곳이니까 주문을 빨리 해서 음료를 마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는 스타벅스잖아. 과연 자리가 있을까? 자문자답해봐도 답은 간단했다. 글쎄, 웬만하면 없지 않을까?
스타벅스 내부는 예상대로 꽉 차 있었다. 심지어 주문하는 줄은 카운터를 지나 문 밖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자리는 슬프게도 없어 보였다. 곳곳에 먼저 자리를 잡은 손님들이 즐비했고 대부분 호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과 다른 재미를 맞닥뜨리는 일. 매장 중앙의 서로 마주 보며 앉는 길고 큼직한 테이블, 딱 두 자리가 남았다. 와, 재수다! 여기 앉아도 될지 눈치를 보며 슬쩍 가방을 내려놓는데··· 어라? 내 맞은편 자리의 한 외국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이 사람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뭐지? 여기 앉지 말라는 건가?'
'그러게. 왠지 좀 불편하네.'
엄마와 나는 눈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눈 뒤, 다른 자리를 찾기로 했다. 우리가 거기 앉으면 자기가 보던 호수 뷰를 가리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평소 눈을 뜨는 습관이 과격한 편? 솔직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 앞에 앉아 뭔가를 마신다면 그게 설령 물 같은 음료라 하더라도 체할 것 같아서 우린 그냥 피하기로 했다. 치사하다 생각했지만 괜히 기분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남자 앞 빼고는 실내 자리는 남은 게 없어 우린 결국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라라? 여기저기 텅텅 비어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앉아있기 어려울 정도로 춥지도 않았고, 햇빛이 강하게 들이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답답한 실내보다는 탁 트인 밖이 더 좋았다. 몇 군데 자리 잡은 다른 손님들은 모두 풍경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도 조용했다. 나는 이번 자리도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울퉁불퉁한 넓은 돌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오른편으로 호수 뷰가 보이는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고 조금 뒤, 우르르 한국인 단체 손님이 몰려와 순식간에 만석이 됐다. 한동안 경상도 사투리 덕분에 상당히 시끄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사실 원래는 일본 스타벅스에서만 파는 스페셜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당장 마셔줘야겠는 건 시원한 아메리카노였다. 늘 하던 대로 스타벅스 어플로 주문을 하려고 하니 잘 안 됐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일본어 학습자! 나는 이번 일본 여행에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적극적인 엄마의 모습이 매 순간 나를 놀라게 했다. 공부했던 외국어를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주 작은 찬스라도 놓치지 않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봤다. 그러게, 가면 말 걸어보고 싶다니까.
그래서 어플로 어찌할지 씨름하는 것보다 가서 직접 말로 주문하겠다는 엄마를 응원했다. 엄마는 한 점의 불안이나 긴장 없이 용감하게 카운터로 향했다. 나를 이십 년 넘게 키운 엄마가 한 번쯤은 나를 보며 느꼈길 바라는 기특함이라는 감정을 나는 그 순간 엄마를 보며 느꼈다.
일본 스벅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한국과 가격이 비슷했다. 487엔으로 약 4,500원. 얼음 가득 넣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와, 이게 사는 이유지. 평소 우유 넣은 라떼를 좋아하지만 텁텁하고 배부른 게 안 당겨서 아메리카노 시킨 건데 참 잘했다. 차가운 커피를 마셔도 춥지 않은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햇살 받은 호수의 윤슬은 하얗게 반짝였다. 사람은 적지 않았는데 공원이 넓어서인지 여전히 한적해 보였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수고한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을 무렵, 길가 쪽 테이블에 자리가 났다. 그 자리는 곧 강아지 두 마리를 데려오신 한 일본 할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난 출중한 애견인은 아니라서 개가 갑자기 짖지는 않을까 다소 걱정되었는데, 두 마리 모두 얌전히 의자에 앉아 쉴 뿐이었다. 이때 나는 이미 팔레트랑 붓을 꺼내 작은 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야외에서 여유 있게 그림 그리며 시간 보내는 것,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던 강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짖지도, 의자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주인의 휴식과 본인의 휴식은 별개라는 듯 서로 아무 방해 없이 그저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만약 주인 할아버지가 주문 줄을 서 있던 일행에게 일본어로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분이 일본 사람이라는 것조차 알 수 없었을 거다.
얼마쯤 고민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막 초코프레즐과 완두콩 드로잉을 마치고 저 강아지를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담고 싶었다. 오호리 공원 내 어느 카페에서 나름의 낭만을 즐기고 있는 조용한 피사체를. 그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녀석이 의자에서 내려오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림과 실제 풍경을 카메라로 한 컷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는 생략하고 바로 펜으로 라인 드로잉부터 시작했다. 녀석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내가 스케치를 끝낼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주었다.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작은 정사각형 종이 위에 배경의 호수 풍경을 모두 담을 순 없었다. 그렇지만 실제 모습 그대로 담자니 넣고 싶은 나무나 풀 같은 요소들이 화면 밖으로 잘렸다. 그래서 그리는 사람 마음으로 화폭 안에 그리고 싶은 것들을 임의로 옮겨 그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과 조금씩 저물어가는 햇빛을 반사한 노란 윤슬과 듬성듬성한 작은 풀들까지. 펜 드로잉은 빨리 끝났고 물감으로 주인공부터 칠해나갈 무렵, 엉덩이 무거운 녀석이 드디어 밑으로 내려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대략의 틀은 다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준 후에.
진정한 야외에서 제대로 자세 잡고 그림을 그려보니 진짜 중요한 걸 깨달았다. 그림이란, 완벽하게 똑같이 종이 위에 옮겨내는 게 아니라 손을 움직이고 있는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걸. 사소하지만, 시멘트 길 위의 나무 그림자가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 생각하는 것, 바닥이 격자무늬라는 걸 알아채는 것, 근데 큰 길이랑 카페 바닥은 둘 다 회색이지만 묘하게 다른 색이라는 것을 아는 것. 포근한 오후 햇살을 담으며 알게 되었다. 그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작은 종이 위에 하나의 그림으로 남는 거라고.
내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녀석이 다시 의자 위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바닥에 담요를 깔아주셨고, 새 보금자리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그곳에 배 깔고 누워 또다시 꾸벅꾸벅 졸던 녀석. 그 작은 머리통 속에 든 생각을 내가 마음대로 유추해 보자면 이렇다.
'저 사람은 뭔데 아까부터 자꾸 나를 힐긋 거리나? 뭐 하는 거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닌데, 처음 보는데. 흐아암, 졸리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힐긋힐긋 쳐다보는데도 충실한 모델로써 자리를 지켜주었던 오호리 공원의 낭만 강아지. 내가 동물의 말을 할 수 있거나 녀석이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는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햇살에 졸았지. 아마 나보다 자주 이 공원에 왔을 것 같은데, 네 덕분에 나는 오늘치 낭만을 채웠어. 사실 이 그림 너 주고 싶었는데, 순간의 내게 너무 좋은 추억이 되어버려서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내가 가져왔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던 나를 보았다면 그건 아마 스케치북에서 그림을 뗼까 말까 고민하던 나야. 미안, 만약 우리가 운명처럼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땐 꼭 너에게 그림을 선물할게. 고마웠어, 너 낭만을 즐길 줄 아는 멋진 강아지구나."
일본의 한 지방 도시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 나는 여행의 낭만을 한 스푼 더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