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꽃같은 시절(아반떼)
원룸에서 나와 담배를 입에 문 영호는 골목길에 주차된 아반떼의 보닛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십 년 전 탁송차가 신형 아반떼를 아파트 입구에 부려놓았을 때의 황홀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가 문득 가슴이 울컥해졌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차 앞에서 햇살처럼 환하게 웃던 아내와 유치원생 딸이 박수를 치며 폴짝폴짝 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부러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푸른 하늘에 뜬 조각구름을 보니 후회가 먹먹하게 밀려왔다.
영호는 팔십 년대에 프레스 기술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자신이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노동운동을 길게 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적잖은 책을 읽었고, 죽는 날까지 정신이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이불을 꿰매며’라는 시를 읽고 나서는 남녀평등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결혼한 이후로 꽤 오랫동안 자신이 그런 삶을 실천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착각이었다.
장남인 영호가 결혼한 것은 서른두 살 때였다. 구십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나이 서른이면 남자도 노총각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고, 영호처럼 장녀였던 아내도 서른을 넘긴 ‘완전’ 노처녀였던 탓에 그들의 결혼은 반대고 자시고 따질 겨를도 없이 축제 분위기 속에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양가 모두 가난한 집안이라, 두 사람은 영호가 여동생 둘과 오랫동안 살아온 재래시장 인근 방 두 칸짜리 빌라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그의 형편을 뻔히 알고 결혼을 결심했던 아내는 시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을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빌라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던 영호의 어머니는 국수 장사를 하는 시장 점포에 딸린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아내는 시어머니의 가게가 빌라 근처에 있어서 퇴근길에 들러서 인사를 해야 했고, 주말에 손님이 많을 때는 일손을 돕기도 했다. 그런 일상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남편에게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친구들은 요즘 세상에 시누이들과 함께 사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주말에 시어머니 장사까지 돕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집안을 예쁘게 가꾸며 사는 게 소원이었던 아내는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처가 식구들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영호에게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반면 손목시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프레스 기술자로 일하는 영호의 주변 사람들은 장가 한번 끝내주게 갔다며 부러워했다. 무엇보다 영호가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가 알아서 침대 머리맡에 물과 신문을 놔준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담배도 침대 위에서 피웠음은 물론이다. 요즘 같으면 놀라서 까무러칠 일이지만, 어려서부터 그렇게 보고 자란 영호 부부는 그걸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물론 그 시절은 몇 년 가지 못했다.
어쨌건 부부는 신혼 기간 내내 별다른 다툼 없이 열심히 맞벌이를 했다.
두 사람의 꿈은 빌라든 아파트든 두 사람만의 공간을 장만해서 오붓하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호는 야근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았고, 아내도 누구보다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나갔다. 다행히 여동생들은 이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차례차례 시집을 갔다.
둘째 여동생이 결혼할 때는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다.
둘째 매제는 함을 팔러 올 자기 친구들이 굉장히 짓궂다며 겁을 잔뜩 줬는데, 하필이면 함을 팔러 오는 날이 한국과 네덜란드의 프랑스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매제의 친구들은 한국이 네덜란드에게 막 골을 먹었을 때 골목에 나타나서 함 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떼를 본격적으로 쓰기도 전에 경찰차가 나타났다. 시끄럽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며 주의를 당부하며 경찰들이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자, 김이 제대로 샌 매제의 친구들은 이참에 축구나 보자며 우르르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영호의 집으로 몰려가서 문 앞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와작 밟은 뒤 술상 앞에 앉아 축구를 봤다.
그전 같으면 함을 파는 풍경이 흔했고, 함 사세요, 우렁찬 소리가 동네에 들리면 이웃들이 몰려나와 신랑 친구들과 신부 가족들이 실랑이하는 모습을 키득거리며 구경하곤 했는데, 시대가 변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로 함 파는 문화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비로소 단둘이 살게 된 영호는 이제야 신혼 기분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됐다며 농을 했지만, 아내는 철없는 아이를 대하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영호는 직장을 옮겼다. 핸드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손목시계 수요가 크게 줄면서 인원 감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옮긴 원형 톱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프레스로 철판을 절단하는 일을 했다.
영호 부부는 가끔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칼로 물 베기였고, 그들은 삼 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걱정이 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부인과에서 검사받아보기도 했는데, 둘 다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중에는 강남에 있는 차병원에까지 가서 시험관 아기 상담도 받았는데, 시술비용이 천만 원이라는 소리에 그대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당시에 천만 원이면 공장 노동자 거의 일 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어떤 날은 아내와 함께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가 쏟아져나온 유모차들을 보곤 그만 울컥해서 하늘을 노려보기도 했다.
그 사이에 영호의 여동생들은 차례차례 아이를 낳았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아내는 당연한 의무라는 듯 시누이들의 산후조리를 도왔고, 영호는 그냥 고맙다는 생각만 했다. 영호의 집에서 여동생들이 산후조리를 하자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던 매제들은 선물과 산후용품을 들고 자주 드나들었고, 그는 그때마다 집 밖에서 매제들과 술판을 벌였다. 여동생들의 산후조리가 모두 끝나자, 아내는 종종 우울해했다.
하루는 영호가 월급날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하고 2차를 가기 위해서 일어나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많이 취해 있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너 이럴려고 나 데려왔니?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아내는 흐느끼는 소리를 더 이어가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놀란 영호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안방 문을 여니 아내는 방바닥에 모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고, 그 앞에는 맥주 두 병과 딸기 몇 알이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아내가 결혼 4년 만에 참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병을 치운 뒤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영호는 자신이 참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가난이 참 뼈아프게 와닿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기적처럼 임신했고, 행여 대가 끊길까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던 양가 부모님은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아내는 남들처럼 심하게 입덧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물냉면 타령을 했다. 그때마다 영호는 80cc짜리 스쿠터 뒷좌석에 아내를 태우고 단골 냉면집으로 향했는데,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온 어느 날 아내가 무심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우리는 언제 지붕 있는 걸 타보나?”
영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운전병으로 제대해서 면허증은 갖고 있지만 자기 형편에 차를 갖는다는 거는 언감생심이었고, 전세 빌라에서 벗어나 저층 아파트라도 내 집을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 급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일곱 시간의 진통 끝에 딸을 낳았다. 퇴근해서 건강하게 태어난 딸을 품에 안은 영호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운 없이 누워있는 아내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날 영호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공장에서 프레스만 만지고 살다가는 딸에게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겠다는 자괴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프레스 기술자이지 산업현장 곳곳이 자동화되면서 기술자의 가치는 눈에 띄게 떨어졌고, 영호가 받는 월급도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가 처음 프레스 공장에 입사했을 때는 금형 기술자라면 산업예술의 꽃으로 최고급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삼류 금형 기술자만 되어도 일반 기술자보다 곱절 이상은 월급을 더 받았다. 당연히 그의 최종 목표도 금형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산업기술의 발달은 금형 기술자의 사회적 지위까지 떨어뜨렸고, 월급도 일반 기술자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딸이 아장아장 걷게 되었을 때 영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힘들게 얻은 딸인 만큼 아내가 육아 문제로 간호사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연히 생활은 더욱 빠듯해졌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열 살 많은 사촌 형이었다.
“너 한옥 목수 일 배워볼 생각 없니? 날 따라다니면 기술도 금방 배울 수 있고, 열심히만 하면 벌이도 꽤 괜찮아. 그리고 이 일은 정년도 없고.”
평생 기름밥을 먹어봤자 비전도 없는데, 무얼 한들 그것보다 못하겠냐 싶었다. 사촌 형의 말을 믿고, 동료들이 붙잡는 공장을 때려치우고, 목수 일을 배워보기로 했다. 사촌 형을 좇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영호는 일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으며 금세 새끼 목수로 자리를 잡았고,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전세 살던 빌라에서 벗어나 저층 아파트 단지에 자신의 명의로 된 아파트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파트를 장만한 것보다 시어머니의 가게가 있는 동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영호는 그때 살짝 서운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면서 영호는 승용차를 사기로 결정했는데, 아내와 마주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무슨 차를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기억이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영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아보라고 하면, 아내와 결혼한 것과 딸이 태어난 것, 그리고 아내와 함께 무슨 차를 살까 고민하던 그 순간일 것이다.
소나타와 아반떼를 놓고 고민하던 영호 부부는 중형차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그들의 처지에 맞는 준중형 아반떼를 사기로 의기투합했다. 계약금을 치른 한 달 뒤 탁송차가 광이 번쩍번쩍 나는 은색 아반떼를 아파트 앞에 부려놓았다. 부부는 딸의 손을 잡고 그 광경을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영호는 새 차를 산 기념으로 차 바퀴에 막걸리를 붓고 경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사촌 형 소유의 트럭만 몰던 그에게 신형 아반떼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자동으로 조절되는 사이드미러와 열선이 깔린 시트는 말할 것도 없고, 액셀을 밟고 가속을 해도 차 안은 마치 절간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처럼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영호는 아반떼를 신줏단지 모시듯 매일매일 먼지를 닦아냈고, 세차하고 난 뒤에는 의식이라도 치르듯 정성스레 왁스를 발라서 번쩍번쩍 광을 냈다. 그런데 차를 산 지 보름쯤 지난 어느 날, 휴일을 맞은 영호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에서 담배를 피워도 뭐라고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점차 강남 등 고층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에서부터 가장들이 베란다로 쫓겨나서 담배를 피운다고 ‘반딧불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는 기사를 보면서 영호는 참 불쌍하게들 산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 애연가들은 모두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워야만 했다. 영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바로 들어오면 냄새가 나니까, 한참 있다가 들어오면 안 되냐고 수시로 잔소리를 해댔다.
오층 베란다에서는 아파트 놀이터가 환히 내려다보였고, 놀이터 앞 주차공간에는 그의 아반떼가 근사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영호는 놀이터에서 친구와 놀고 있는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날렸다. 그런데 그때 딸애 친구가 조그만 돌멩이를 획 집어 던졌다. 하필이면 그 돌멩이가 아반떼의 운전석 쪽 문짝에 맞았는데, 영호의 귀에는 쿵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는 날다시피 아파트 밖으로 내달았고, 차의 문짝을 짯짯이 살폈다.
문짝 정중앙에 팥알 크기로 콕 찍힌 자국이 났는데, 영호의 눈에는 그것이 축구공처럼 크게 보였다. 너무 화가 나서 말도 나오지 않는데, 차마 일곱 살짜리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막막하게 서 있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딸과 친구는 깔깔거리며 놀이터에서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돌을 던진 아이의 손목을 잡아끌고 그 애의 집으로 쳐들어갈까 말까 한동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집 안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고, 흠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던 아내는
“껌을 붙이면 안 보이려나?”
농담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걸 농담이라고 해, 지금?”
“놀이터 앞에 주차했으니까 그냥 우리 딸이 그랬다고 생각해. 그리고 중고차 된 기념으로 내가 술상 차려줄 테니까 그만 올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순간 ‘그래 차는 사는 순간 중고차이지. 언제까지 애면글면 애지중지 떠받들고 살 거야? 그만하자, 내 아반떼도 이제 중고차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돌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듬해에 주차하다가 실수로 뒷범퍼가 찌그러졌을 때에도 그냥 그러려니 별다른 심경의 변화가 일지 않았다. 그래도 아반떼를 향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어서 영호는 열심히 차량을 관리했다. 덕분에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그의 애마는 잔고장 한번 없이 쌩쌩 잘도 내달렸다.
영호는 아반떼에 몸을 싣고 열심히 한옥을 지으러 다녔다.
무탈한 삶에 변화가 생긴 건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였다. 프레스 기술자가 되기 전부터 절친이었던 친구가 볼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다며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자고 했다. 영호가 결혼하기 전에 나주로 귀농을 한 친구는 일 년에 몇 번이고 수확물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두 사람은 삼겹살집 앞에서 반갑게 포옹했고, 불콰하게 취했다.
계산을 마친 영호는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어이 친구, 2차는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찐하게 한 잔 더 하고, 내일 아침에 해장국 먹고 가.”
하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꽤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동무를 풀었다.
“그냥 어디 호프집에나 가서 한잔 더하고, 난 여관에서 잘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내 집이 저 앞인데 자네가 여관에서 자는 게 말이 돼?”
“이 사람 세상물정 모르고 헛소리하는 건 여전하구먼. 요즘 세상에 누가 친구 집에서 술 먹고 잠을 자? 시골 여자들도 자기 집에서 누구 술 먹이고 재우는 거 다 싫어해요. 세상이 그렇게 변했어!”
“기다려봐. 우리 마누라는 다르거든요.”
영호는 여전히 호기로운 태도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당신 원석이 알지? 지금 우리 동네에서 한 잔 먹고 집에 가서 이 차 할 거니까 준비 좀 해줘.”
그러나 아내는 지금 제정신이냐며 새된 소리로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예상치 못한 아내의 반응에 화가 난 영호는 멀리서 온 친구를 내 집에서 재우지도 못하냐고 큰 소리로 맞받아쳤으나, 아내는 모텔에 가든 찜질방에 가든 알아서 하라며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친구에게서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감정을 억눌러가며 설득해보았으나, 아내는
“좌우지간 집에 데려오기만 해봐. 이참에 아주 이혼을 해버릴 테니까.”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협박을 한 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날 영호는 모텔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대취했고, 아침에 일어나니 친구는 일이 밀려서 급히 내려간다는 메모만 남기고 떠난 뒤였다. 간밤의 기억은 오락가락 엉망진창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넌 어떻게 시골에 사는 나보다 세상 변한 것도 모르고 더 보수적이냐’는 친구의 한숨 섞인 목소리는 또렷이 기억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호는 화가 삭지 않아서 아내와 결혼 이후 처음으로 대판 싸웠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두 달 동안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다가 딸이 중3 2학기 기말고사를 보고 났을 때 두 사람은 또 한 번 옆집에서 들릴 만큼 큰소리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싸웠다.
아내는 애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대학이 중요하다며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기 시작했고, 수학 과목에는 과외까지 붙였다. 보다 못한 영호가
“적당히 좀 해. 그깟 성적이 그렇게 중요해?”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가 애가 대학 못 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하네 마네 난리인데, 제발 세상 돌아가는 것 좀 살피면서 살아. 그리고 솔직히 당신이나 나나 대학만 나왔어 봐, 우리가 그 고생을 했을 거 같아?”
아내는 벌컥 역정을 내면서 안방 문을 쾅 닫아버렸고, 보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말을 붙이려고 하면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안방으로 사라졌고, 그는 거실 TV 앞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소파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부부는 딸의 성적표가 나오면 자주 다퉜다.
그러다가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영호가 일을 마치고 귀가하자마자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할 말이 있다면서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동안 내가 몇 년간 꾹 참고 얘기를 안 했는데, 이번 추석부터 나도 남들처럼 점심 먹고 친정에 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아가씨도 명절 아침 시댁에 갔다가 점심이면 오잖아? 그런데 난 그러면 안 돼? 그리고 그런 집들 굉장히 많아. 당신네 식구들만 모르고 있는 거야. 좌우지간 올 추석부터는 점심 먹고 바로 친정에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지금까지 잘해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당신은, 아니 당신네 식구들은 내 감정이나 입장 생각해본 적 있어? 아가씨들이 나랑 함께 살 때 집안에서 손가락이나 하나 까딱했어? 지들 바쁘다고 청소를 하기를 해, 설거지를 해. 그때 난 내가 식모가 된 기분이었어. 그래도 그때는 참을만했어. 그런데 내가 임신도 못 하고 있을 때 아가씨들이 산후조리를 하러 온 건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때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아가씨들이 입덧한다고 헛구역질할 때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 줄 알아? 입덧하고 싶어도 못 하는 내 앞에서 매일매일…. 내가 그때 우울증 알았던 거 아직도 모르지?”
영호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할 말을 마친 아내는 그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으로 휭하니 들어가 버렸다. 그는 한동안 정신이 멍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문득 ‘넌 왜 시골에 사는 나보다 더 보수적이냐’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지만, 영호는 좀체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가족들을 위해서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명절 당일 점심 식사를 마친 아내는 시댁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당당한 태도로 선언을 해버렸다.
“죄송한데요, 저 앞으로는 명절 당일에 친정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 해요.”
순간 집안 분위기가 싸해졌고, 어머니는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래 그동안 네가 애 많이 썼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하자.”
하고 며느리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하지만 영호는 느낄 수 있었다. 행여나 아들이 이혼이라도 당하게 될까 봐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의견을 수용했다는 것을.
하지만 아내의 파격적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의 공부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명절에 시댁은 물론이고 친정에도 가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왔다.
그 일을 계기로 영호 내외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고, 별거까지 하게 되었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자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졌고, 딸이 고3이 되던 해에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영호는 어쩔 수 없이 이혼하게 되었지만(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하는 회한은 지금도 가슴 아프게 남아있다), 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닌지 두고두고 미안했다.
아내의 바람과 달리 애초부터 공부에 별로 뜻이 없었던 딸은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간신히 들어갔고, 거기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딸은 작은 규모의 의류회사에 취직했는데, 회사가 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영호는 딸에게 아반떼를 물려주기로 하고, 운전면허학원 수강증을 끊어주었다. 운전면허를 딴 딸에게 도로 연수를 시킨 영호는 단골 카센터에 가서 차량 상태를 점검한 뒤 차 키를 넘겨주기로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아빠, 뭘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
영호가 아반떼 문짝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데, 딸이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딸에게 차 키를 넘겼다. 그렇지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딸에게 새 차를 사주지 못하고, 이십 년 넘게 몰아온 중고차를 물려 주는 게 못내 미안했다.
“돈 많이 벌면 아빠는 무슨 차 사고 싶어?”
자동차의 시동을 켠 딸이 갑자기 물어왔다.
“글쎄, 이제 아빠는 마티즈나 모닝 같은 경차나 하나 살까 싶은데.”
“아빠는 그게 문제야. 남자가 너-무 야망이 없어요.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제네시스 사줄게.”
호기롭게 얘기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딸의 모습에 순간 울컥한 영호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며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지내니?”
“말수 적은 할머니로 천천히 늙어가는 중이야.”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딸의 표정에서 묵은 슬픔을 보았다. 그는 그게 더욱 가슴 아팠다.
그때 문득 영호는 깨달았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의 또래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바빴다. 노래방이 없었던 팔십년대 후반까지 술집에서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옆자리에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술과 안주를 시켜주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목욕탕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웃으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고, 기차를 타면 초면인 사람들이 눈인사를 주고받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담배를 태우며 술을 마시다가 죽이 맞으면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사회가 변화하면서 그런 문화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사회 변화의 양태를 설명하는 신조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호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장례문화의 변화였다. 장례식장에 가면 고스톱을 치면서 밤을 새우는 게 당연했는데, 어느 순간 다들 차가 생기면서 밥만 먹고 일어나는 게 흔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영호는 봉건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갔더라면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자책도 했다.
아내와 긴 냉전기를 거치는 동안 딸은 중간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성인이 된 후 처음 술잔을 부딪쳤을 때, 딸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한 어조로 ‘난 아빠 없이 컸어’라고 말했다. 감정이 북받친 그가 눈물을 훔치며 정말로 미안하다고, 엄마하고 너한테 모두 미안하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딸이 술잔을 비운 뒤 한마디 했다.
“괜찮아. 그래도 아빤 착하긴 했잖아.”
그 말이 영호에게는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콧날이 시큰거린다.
“아빠, 내가 어제 알바비를 탔는데, 차도 받았겠다 소주 한잔 쏠게.”
딸은 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고 차를 몰았다. 이혼하기 전에 온 가족이 자주 갔던 닭갈비 집에 주차한 딸은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영호는 딸에게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이른 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한동안 아반떼의 보닛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닭갈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꽃같은 한 시절이 흘러갔다.